Cross the Rubicon; '주사위는 던져졌다' (3)

이영록
이영록 · Dilettante in life
2023/01/17
 (1편, 2편에서 이어집니다)

  카이사르는 BC 49년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여 48년의 집정관이 되려 했던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49년에 집정관이 되려 했다면 BC 50년 선거에 출마했겠지요. 물론 눈에 띄는 군사 작전은 BC 51년에 다 끝났습니다만, 로마군에게 짓밟힌 갈리아 부족들이 자신의 뜻대로 따라 주는지 확인하려면 시간이 당연히 더 필요합니다. 긴급한 일이 생기면 당연히 갈리아 중부나 북부까지 뛰어갈 수 있어야 하므로, 로마에서 뭘 진득하게 해 보기는 힘들겠죠. 아래 지도 1에서 로마에서 정복지의 가운데쯤 위치한 파리까지 거리는 1364km나 됩니다. 마차 등으로 하루 100km를 간다 해도 14일이나 걸립니다.

▼ 지도 1.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으로 정복한 영역, 본국 이탈리아와 그 북쪽 속주들; Belgae와 Gallia (comata)로 불리던 지역. '갈리아 전쟁기'에 비중 있게 등장하는 부족들의 거주 지역도 붙여 놓았다. 
  카이사르가 BC 58~50년의 9년 동안 정복하고 안정시킨 지역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다. 현대의 프랑스와 벨기에를 합친 것과 비슷하다.
google map
  BC 51년 초여름까지는 카이사르가 갈리아 코마타에서 뒤처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 후에는 갈리아 키살피나의 라벤나(Ravenna)에서 로마 정치에 손을 댈 수 있을 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라벤나에서 로마까지는 360km밖에 안 되니 말을 갈아타는 '초고속' 통신으로 하루 안에 소식을 받아 볼 수 있죠.

  BC 51년의 집정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Marcus Claudius Marcelus)는 BC 52년의 알레시아 전투(Battle of Alesia)에서 카이사르의 위대한 승리가 실질적으로 갈리아 전쟁을 끝냈으니, 이제는 해임시켜 소환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덧붙여 앞 포스팅에서 보았듯이, 폼페이우스가 제출한 법이 부재 입후보를 불가능하게 했으므로 호민관들의 입법은 자동적으로 무효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이미 3월에 마르켈루스의 행동에 불쾌감을 표시했습니다. 여기서 카이사르의 임기 종료 시점을 다시 뜯어보면...

  • 짧게 보면; 루카 회담(BC 56 3월에서 4월 초) 후 집정관이 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임기 초(BC 55의 초)에 5년 연장했으므로, BC 50년 초 종료
  • 길게 보면; 원래 임기인 BC 54 12월 말일에서 5년 연장했으므로, BC 49년 12년 말일

  자신이 발의한 법에 따라, 어느 편으로 보건 BC 51년에는 카이사르 임기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셈입니다. 폼페이우스는 여기 근거해 "내년(BC 50) 3월 1일 이전에는 카이사르의 임기 종료에 동의하지 않겠다"고 확언했습니다. 
  그런데 속사정을 잘 뜯어보면 이것이 카이사르에게 호의적이라고만 해석하긴 어렵습니다. 우선, BC 49년에 출마하려면 그 연말까지는 총독직을 유지해야 하는데, BC 50년 3월 1일이면 무려 1년 10개월이나 시간이 뜨는 것입니다. 그리고 BC 51년 9월의 논의 당시 폼페이우스의 발언을 키케로가 받은 편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질문자; 만약 카이사르가 군대를 유지한 채 집정관이 되기 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폼페이우스; (부드럽게) 만약 내 아들이 몽둥이를 들고 내게 달려든다면 어떻게 될 것 같소?

  카이사르파 의원도 꽤 있었으며 [1], 정보 수집에 철저했던 카이사르가 공석에서 오간 이런 대화를 몰랐을 리가 없었을 테니, 그가 폼페이우스의 의도를 믿지 못한 것은 당연합니다. 어쩌면 루카 회담 당시 카이사르와 나머지 둘이 카이사르의 임기를 '길게 본' 쪽으로 합의했지만 폼페이우스가 뒤집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카이사르가 이 뜻으로 말했어도 나머지 둘이 진의를 눈의채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유일한 현장 증언이 가능한 크라수스는 이미 죽었으니 어느 편이 정확한지는 당시에도 확인할 수 없었겠지요.
  폼페이우스는 반면, 카이사르가 아무리 최근에 잘 나간다 해도 아프리카(술라의 부하로서 민중파 토벌), 스페인(민중파의 마지막 장군이던 세르토리우스 토벌), 아시아(폰투스의 미트라다테스 격파 및 시리아, 팔레스타인 점령)를 제패하여 세 번 개선식을 연 자신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자신감을 이런 식으로 드러냈습니다.

                                                                        * * * * * * * * * * * * 

  BC 50년이 되자, 집정관은 마르쿠스에서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Caius Claudius Marcelus)로 바뀝니다. 역시 강경한 반 카이사르파였지요. 다른 집정관은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파울루스(Lucius Aemilius Lepidus Paullus)였는데, 아버지가 폼페이우스에 패해 망명해 사망한 악연에도 불구하고 특히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기미는 별로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해에 주목할 호민관은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Caius Scribonius Curio)였는데, BC 59년 카이사르가 집정관일 때 공개석상에서 삼두와 카이사르를 비판했던 일이 있기 때문에 원로원파에서는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지금부터 보기로 하지요.
 
  3월 1일이 되자 집정관 마르켈루스는 예상대로 카이사르의 후임자를 결정해 속주로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웬걸 레피두스 파울루스는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쿠리오의 주장은 원로원파 의원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지휘권을 박탈하려면, 같은 시기에 폼페이우스의 스페인 속주 지휘권도 박탈해야 합니다.

  이 주장은 "폼페이우스도 특권이 많은데, 그보다 최근에 공이 훨씬 많은 카이사르가 가진 정도의 특권이 뭐가 그리 문제냐"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에서 말했듯이 폼페이우스가 스페인 속주 총독이면서도 임지로 떠나지 않았던 것도 매우 예외적이었던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돌기 시작한 소문은 호화롭고 파티를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안토니우스 등과 함께) 빚더미에 올라 있던 쿠리오의 빚을 카이사르가 갚아 줬다는 것이었습니다. 필자에 따라서는 당시 쿠리오의 빚은 젊은 시절 카이사르의 빚보다 더 많았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카이사르의 빚은 저 같은 21세기 한국인으로서는 경악을 금치 못할 수준이었습니다 (...) [2]  빚더미 때문에 망가지기 전 카이사르가 크라수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듯이, 이번엔 카이사르가 쿠리오를 도와 주면서 자기 편으로 만들었던 건 누구도 모르고 있었지요. 사실 쿠리오는 12월 초 호민관이 되고 나서 빈민들을 위한 정책들을 주장했지만 이렇게까지 원로원파를 물먹일(!) 줄은 누구도 다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레피두스 파울루스는 이 일 전까지 조상이 세운 바실리카 아이밀리아(Basilica Aemilia)를 재건하는 데 총력을 쏟고 있었는데, 그도 공사 대금으로 카이사르에게 1500 탈렌트를 (저렴한 이자로) 빌렸다는 소문이 돌았지요.

  빚쟁이던 카이사르가 이 돈이 어디서 생겼냐고요? 당연히 갈리아를 정복해서 들어온 수입이죠 뭐....

  카이사르가 이런 식으로 돈을 풀면서 행정관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BC 50년에는 큰 군사 활동이 거의 없어서 전투 계절인 초여름에 라벤나의 총독 관저로 돌아올 정도로 시간에 여유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에게 불리한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거부권을 행사해 버티는 쿠리오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두 집정관 중 한 명까지 반대로 돌아섰으니 원로원은 사실상 반 카이사르 결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원로원파가 가능한 꼼수까지 포기한 건 아니었습니다. 시리아 속주에 가 있던 비불루스는 파르티아의 위협 기미가 있으니 병력을 급히 보내라고 보고서를 올렸는데 [3], 원로원은 군사력이 있던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에게 각각 1개 군단씩 시리아로 보내라 결의했습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 중간에 병력이 더 필요해지자 폼페이우스가 편성한 군단 하나를 보내 달라 부탁했고 그가 수락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10개 군단 중 1개는 폼페이우스의 것이었습니다. 그가 시리아로 보내려 카이사르 휘하에 있는 자신의 군단을 선택하자, 카이사르는 경험 있는 고참병 2개 군단을 잃게 된 셈입니다. 그런데 카이사르도 예상 못하지는 않았겠지만, 원로원은 2개 군단을 데려가고 나서 시리아로 보내지 않고 중부 이탈리아에 주둔시켜 버렸습니다. 물론, 비상시에 자기네가 부리려 한 꼼수지요. 
   그리고 가을에 여러 선거가 있었는데...
 
  • 호민관에 당선된 사람 중 중요한 인물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였습니다. 철저한 카이사르파고 갈리아 전쟁에서 군단장을 맡았었지요.
  • 집정관 당선자는  렌툴루스(Lucius Cornelius Lentulus Crus)와, BC 50년의 집정관과 동명이인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Caius Claudius Marcellus)였고 둘 다 강경한 반카이사르파였습니다. 
  • 재무관(censor)에는 밀로에게 죽은 클로디우스의 형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Appius Claudius Pulcher)와, 카이사르의 장인 칼푸르니우스 피소가 당선됩니다.[4]

  앞으로 안토니우스는 철저히 카이사르의 대변자 역할을 수행합니다. 아주 잘 했다고 보긴 좀 미묘합니다만. 이 점에서는 쿠리오가 그보다 나았다고밖에 할 수 없는데, 안토니우스가 평민들이 회의하고 호민관을 선출하는 평민 집회(comitia plebis tributa)에서 원로원을 자극할 발언을 수시로 쏟아냈기 때문입니다. 폼페이우스가 이렇게 말한 일이 있을 정도입니다.
 
카이사르의 시시껄렁한 회계 감사관(quaestor)도 저렇게 행동하는데, 카이사르가 공화국을 장악하면 어떻게 되겠소?

  집정관 선거에서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장이었던 술피키우스 갈바(Sulpicius Galba)를 내보냈으나, 폼페이우스의 지원을 받지 못해 실패합니다. 선거를 본 사람들은 '이두'가 완전히 갈라섰다 생각할 수밖에 없죠.

   현직 집정관 마르켈루스는 회의만 열리면 카이사르를 비난하고 쿠리오는 반박 및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이래저래 호민관의 임기 종료일인 12월 8일이 가까워졌습니다.  그 동안에도 원로원파 재무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적극적으로 원로원 의원 자격이 없다 생각하는 사람을 내쫓으려 했는데, 자신의 속주 총독 시절 행적도 별로 좋지 못해 키케로에게 강하게 비판당한 것을 생각하면 표리부동이긴 했습니다. 피해를 본 것은 당연히 카이사르파 사람들이었고, 역사가 살루스티우스(Caius Sallustius Crispus)도 이 중 한 명입니다.
  12월 1일, 마르켈루스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다음을 표결에 부쳤습니다.

   (1) 카이사르가 총독에서 사임해야 한다; 대다수 찬성
   (2) 폼페이우스가 총독에서 사임해야 한다; 대다수 반대.

  이 때 쿠리오가 "둘 다 사임해야 한다"고 표결을 요구했습니다. 결과는 놀랄 만하게도, 22명만 반대하고 370명 이상이 찬성했습니다. 이것은 원로원의 표결 결과가 숫자까지 남은 아주 드문 예입니다. 반대한 22명은 대부분 앞에서 말한 강경한 반 카이사르파였다 보면 됩니다.  격노한 마르켈루스는 "카이사르의 노예가 되기 원하냐? 원하면 그러라고!"라 소리치고, 표결을 무효로 돌리고 산회했습니다.
   이는 원로원 의원 대다수가 카이사르를 좋아하지는 않아서 양자 택일이라면 폼페이우스를 택하겠지만, 그렇다고 내전을 치르느니 둘 다 사임시키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음을 보여줍니다. 키케로도 내전보다는 그냥 카이사르를 다음 집정관에 출마시키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으며, 카이사르 반대파의 영수 비슷했던 소 카토도 내전이 일어나기를 바랬다는 언동은 거의 없습니다. 정말 전쟁이라도 불사하자고 주장했던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아 보입니다. [5]
   그런데 집정관 마르켈루스는 이 후에 또 한 걸음을 내딛는데....

  === to be continued ===

[1] BC 58년의 집정관이며, 카이사르의 장인이었던 칼푸르니우스 피소(Lucius Calpurnius Piso Caesonius)가 대표적.
[2] 카이사르는 공직에 취임하기 전 1300 탈렌트의 빚이 있었다는데, 이게 보수적으로 잡아도 1조 원이 훨씬 넘는 가치에 가깝습니다. 헐... 카이사르의 돈 쓰는 방식만 썰풀어도 작은 책 하나는 나올 정도.
[3] 이게 또 걸작인데 터키 남부 부근 지역 유력자들의 군대와 싸워 정말 말아먹을 정도로 패한 모양입니다. 이래서 병력이 모자라자 SOS친 거죠. 바로 옆 속주에 총독으로 있던 (비슷한 수준의 전투에서 이긴!) 키케로가 도와줄까 제안을 했지만 듣지도 않고 중앙 정부에 알렸습니다. 목적이야 뻔하죠.
[4] censor와 quaestor의 번역은 아직 통일되지 않은 듯한데, 여기서는 전자를 '재무관', 후자를 '회계 감사관'으로 했습니다. '감찰관'과 '재무관'으로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censor가 국가 전체의 회계 및 예산 감사 및 시민 인구 조사, 원로원 의원의 부적격 여부 등 재무와 감찰 두 기능을 다 맡았기 때문에 번역이 갈립니다. 반면 quaestor의 주업무는 군단의 회계 출납이고, 공화정 후반에는 군단장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5] 뒤에 보겠지만, 루비콘 도하 전에 강경한 태도를 취했던 사람들 일부는 정작 카이사르가 군대를 거느리고 오자 소극적 아니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물러앉기도 했습니다. 좀 우습게도 BC 50년 집정관, 바로 그 "카이사르의 노예가 되라고"라 일갈했던 마르켈루스도 그 중 한 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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漁夫란 nick을 오래 써 온 듣보잡입니다. 직업은 공돌이지만, 인터넷에 적는 글은 직업 얘기가 거의 없고, 그러기도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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