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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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즈를 접는 일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김수영 시인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속 강렬한 문장이다. 중학생 시절 나는 이 시를 무척 좋아했고 달달 외워냈다. 부러 암기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었다. 거대한 권력과 이 사회를 지배하는 억압 그리고 폭력에 저항하는 대신, 개인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탓하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그런 면에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이 시대에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동시에 구시대적인 가치관-특히 여성에 대한-이 담겨있기도 하다. 그래서 학창시절에나 지금에나, 나는 그 앞에서 전율하는 한편 마음 한 구석 서글픔을 느낀다.  시인은 야전병원에서 거즈를 접던 자신의 모습을, ‘왕국의 음탕 대신에 고기에 비계만 나왔다고 옹졸하게 분개하는’ 비겁과 등치시킨다. 여기엔 ‘남자’가 포로경찰 대신 ‘이런 일’이나 하고 있느냐는 정보원의 비아냥이 곁들여진다. 이것은 분명 대유이나 애석하게도 그 순간 생명을 살리고 돌보는 일은 사람...
문화/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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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 시대, '좋아하는 것'의 힘

 콘텐츠가 돈이 되는 시대 다.  로봇이 인간 노동력을 대체할 4차 산업혁명에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그 사이 도래한 '콘텐츠 사회'라는 3.5차 산업혁명을 통과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성이 집약된 기술이 곧 생산성이라 믿던 근대를 지나, 이제는 감성과 예술적 상상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바로 그 첨예한 기술이 예술적 상상을 현실로 구현하게 된 것이다. 유희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는 이미 태어났다.  이 시대엔 누구나 컨텐츠의 소비자이며 동시에 생산자가 된다. 유튜브가 포문을 연 1인 미디어 시대는 다른 영역으로도 확장되었다. 플랫폼은 조회수 등의 지표를 근거로 이용자들에게 광고 수익을 공유한다. 피씨 통신을 넘어 포털 사이트와 각종 커뮤니티, 개인홈페이지가 생겨나던 2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다. 그 시절엔 글의 조회수가 많이 나오는 이용자에게, '당신 때문에 서버 유지비가 많이 나오니 탈퇴를 하거나 이용요금을 더 내주세요'...
노동/인권/사회 · 문화/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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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범은 감시받지 않는다 : 넷플릭스 <인간 수업> 다시 보기

넷플릭스 드라마 <인간 수업>은 유령폰을 이용해 포주 노릇을 하는 남자 고등학생을 중심으로, 죄의식 없이 범죄에 가담하는 청소년들을 그린다. 고등학생은 지능적이고 조직적인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나이라 소년법의 적용도 받지 않는다. 더구나 성매매를 알선했다는 것은, 극에서 그려지듯 어떠한 배경이 있더라도 용인될 수 없는 일이다. 더 극한에 몰린 상황이더라도 보통 학생들은 그런 범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정신과에 간다면 분명 '품행장애-미성년자에게는 인격장애라는 진단을 내릴 수 없으므로, 반사회성이 높은 미성년에게 내리는 진단-'라는 진단명이 붙을 법한 아이들이다. 그리고 이런 말을 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를 보며 내가 주목한 것은 악행을 저지르는 아이들보다는 그 뒤에 있는 어른들이었기 때문이다.   포주 노릇을 하는 남학생 '오지수', 그에 동참하는 여학생 '백규리', 그리고 포주의 정체를 모른 채 조건만남을 하는 민희는 같은 ...
문화/예술 · 노동/인권/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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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세상, 멕시코 아이들의 꿈: <호랑이는 겁이 없지>

영화 <호랑이는 겁이 없지>는 마약 전쟁이 어둑하게 지배해버린 멕시코 어린이들의 현실을 그린다. 주인공 에스테리아의 엄마는 옆집의 누구, 또 그 옆집의 누구가 그랬듯 카르텔에 납치되어 사라졌다. 에스테리아는 자기처럼 부모 잃은 아이들 무리에 끼어들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유일한 여아로서 그 안에 섞여 든다. 영화는 에스테리아가 엄마와 함께 지내던 시절의 추억을 짧은 쇼트로 중간중간 삽입해 보여준다. 에스테리아는, 엄마의 손목에 걸린 팔찌에 관심을 가진다. 엄마는 말한다. 네가 어른이 되면 줄 거라고. 그런 기억의 파편을 따라, 엄마의 목소리를 따라 에스테리아는 남자아이들 무리와 함께 엄마를, 그리고 엄마를 납치했을 카르텔 조직원을 추적해간다. 그 과정에서 에스테리아를 엄마처럼 따르던 가장 어린 남자아이는 조직원에 의해 살해된다. 아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장례를 치른다. 그리고 에스테리아는... 끝내  엄마의 시신을 찾아낸다. 엄마는, 비닐에 싸인 채 살...
노동/인권/사회 · 문화/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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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걸> 원작 속 여성들의 말: 절대, 절대 죽지마

고백하건대 나는 웹툰 <마스크 걸>의 열성팬이다. 처음 네이버에 만화가 연재 된지 십 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이따금 에피소드 하나씩을 무작위로 눌러 정 주행을 시작한다. 최근 드라마로 각색된 <마스크 걸>이 넷플릭스에 공개되었다.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이야기를 향한 세간의 평은 ‘자극적이다, 피폐하다’는 말이 주류를 이룬다. <마스크 걸> 서사의 많은 요소가 어둡고 폭력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시즌 세 개, 무려 4년 가까이 연재된 이 만화의 전체 풍경에서 읽어낸 분위기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분절된 컷을 따라 매미/희세 작가가 그려내는 모미의 삶을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마음 한 구석이 묘하게 편안해지곤 했다. 수없이 작품을 다시 본 까닭은 거기에 있었다. 살인과 다툼, 잔혹한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그 풍경 안에서 모미는 절대로, 절대로 죽지 않았다. 아니, 절대로 죽임 당하지 않겠다 이를 악무는 것 같았다. 모미는 선하지도, ...
문화/예술 · 노동/인권/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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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끄 상뻬, 내가 사랑한 두 얼굴

우리에게 <꼬마 니콜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삽화가, 장 자끄 상뻬. 니콜라 시리즈 외에도 <얼굴 빨개지는 아이>, <자전거 못 타는 아이> 등의 동화와 좀머씨이야기의 삽화 역시 유명하다. 그리고 <상뻬의 어린 시절>이라는 책이 있다. 책에서 인터뷰를 통해 상뻬가 회상하는 유년기는 학대로 점철돼있다. 그 학대의 심각도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판단하겠지만.. 그런데 유년기 보호자들에 대한 상뻬의 태도가 굉장히 독특한데, '그들은 어쨌든 최선을 다했을 거예요. 저는 그래서 전혀 원망하지 않아요'하는 태도를 보인다. 상뻬씨가 이 글을 볼 가능성이 전혀 없기에 하는 말이지만, 미안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부모는 딱히 최선을 다한 것 같지 않다.. 상뻬가 그려내는 삽화에 대해 가장 많이 들리는 평은 '한없이 행복한 풍경을 그린다'는 것 아닐까? 어두운 아동기를 보냈음에도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부모에 대한 원망을 아예 피했기 때문...
문화/예술 · 노동/인권/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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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라는 일: <박송아지와 강소천 동화나라>

박송아지와 강소천 동화나라-강소천/박철민-웅진주니어  1915년에 태어나 1963년 돌아가신 강소천선생님의 동화는 요즘 어린이들에게 조금 낯선 이야기들일지도 모른다.그렇지만 책을 한장 한장 넘길수록, 이야기 속 인물들의 감정을 깊이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배경과 상황이 다르다 해도, 노는 것 좋아하고 장난치기 좋아하는 아이들의 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으니까.  <마늘 먹기>에 나오는 아이들은 숙이네 사랑방에 모여 다같이 마늘을 깐다. 김장철이기 때문이다.이제는 김장자체도 잘 안 하거니와, 동네사람들이 힘을 합쳐 김장을 하는 풍경은 거의 사라진 것 같다.하여간, 아이들은 이렇게 마늘을 깔 때면 언제나 누가누가 마늘을 많이 까나 내기를 한다.그런데 이 내기는 항상 똑같이 끝나 재미가 없다. 손이 큰 노마가 늘상 이기니까.노마는 '이번에는 마늘을 제일 많이 먹을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다.제일 어리고 손이 작아 마늘 까기 내기에서 꼴찌만 하던 돌이가 대답한다.-내가 ...
생활/사건사고 · 문화/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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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현실적인 비극: <천상의 릴리아>

영화 <천상의 릴리아>는 해체된 구 소련 중 한 지역에서 보호자 없이 살아가다 스웨덴에 가게 된 소녀 릴리아 이야기다. 릴리아는 의도적으로 남자친구로 접근한 브로커에게 속아 스웨덴에 도착한 후 성착취 피해자가 된다. 영화는 결국 지상천국이라 불리는 스웨덴에서 일어나는 타국 소녀들의 성착취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릴리아가 스웨덴에서 겪는 이야기가 러닝타임 대부분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의 삶에는 여러 일이 일어나고 극단적으로는 릴리아와 같은 일도 겪는다. 보호받지 못하고 폭력의 그늘에 살아가는 아동과 청소년이 그들을 보호해야 할 이들에게 외면당할 때 그들에게 또다른 폭력을 가하고 착취하려 하는 이들은 귀신같이 아이들을 알아본다는 보편적 비극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영화에서 릴리아는 소위 비행청소년인데, 부모와 사회와 학교로부터 모두 외면 당하고 범죄자에게 속아 릴리아에겐 지옥이 된 '지상천국'스웨덴에 간 그를 위로하는 유일한 존재는 먼저 ...
문화/예술 · 생활/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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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보다 아름다운 세계: 미셸 오슬로의 애니메이션

미셸 오슬로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아름답다. 1. <파리의 딜릴리> 먼저 소개하고 싶은 작품은 <파리의 딜릴리>. 슬픈 일을 겪은 아이와 어른들에게 이 작품을 추천한다. 고향에서는 프랑스 피가 섞였다고,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인이 아니라고 차별받는 자그마한 여자아이 딜릴리가 끔찍한 일을 겪은 뒤 탈출하여 같은 일을 겪은 아이들을 구하는 이야기다. '끔찍한 일을 겪은 아이들을 위한 노래'로 끝나는 이 영화는 내 어린 날에 대한 위로가 되어주기도 했다. 어두컴컴한 하수구에 갇혀 네 발로 길 것을 강요 당하다 탈출한 여자와 아이들은, 다시는 네 발로 기지 않기 위해 두 발로 걷는 일을 배운다. 하지만 여전히 네 발로 기기만 하는 이들 역시 보호받는다. '해와 비, 낮과 밤, 과일과 꽃... 아름답든 추하든, 현명하든 어리석든 모두 하나' 라는 노랫말이 너무도 아름다운 까닭이다. 딜릴리는 자신이 납치됐을 때 네 발로 기었던 것이 부끄럽지만, 그를 구출한 이들은...
문화/예술 · 생활/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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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세계에 맞서는 한없이 작은 세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개봉하자마자 봤던 <그랜드부다페스트 호텔>을 오랜만에 다시 봤다. 무시무시한 음모와 살인사건에 용기와 유머로 맞선 개인의 삶과 사랑은 군인의 총알과 전연병 앞에 끝나버린다. 세상의 거대한 흐름은 그렇게 개인의 세계를 무자비하게 종결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세계 안에서 중요한 위기에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와 무관하게. 하지만 그 개인의 세계는 또다른 개인의 세계 속에서 그에 의해 재생되고 죽지 않으며 영원히 전해진다. 그렇게 우리의 세계는 끝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거대한 세계에 맞서는 한없이 작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커다란 사건이나, 자신에게 호텔을 넘기고 부를 안겨준 이를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짧았던 행복을 기억하기 위해 지켜졌다. 어쩌면 내가 이 생에서 놓지 못하는 것도 그렇게 작은 것들일지도 모른다. 그 세계가 실은 이미 끝나버렸을지라도, 끝내지 않기 위해... 사람은 그런 존재인가보다.
문화/예술 · 노동/인권/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