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 무릎 꿇다 2] 소설가들은 대체 왜? - 『안나 카레니나』
2024/03/28
친구가 이렇게 물었던 적이 있다. “도대체 소설가들은 장소 묘사를 왜 이렇게 많이 하는 거야?” 서너 줄이면 그냥 읽어주겠는데, 어떤 장소가 어디에 있고 무엇에 둘러싸여 있는지를 두 페이지에 걸쳐 써 놓은 걸 보면 속이 터진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인물 묘사에 대해서도 투덜댔다. 어떤 인물인지 간략하게 알려주면 되지 굳이 혈색이 어떻고, 어떤 옷을 입었고, 표정이 어떤지를 왜 그렇게 길게 써야 되는지 모르겠다고. “그러게, 왜 그럴까.” 나는 웃으며 얼버무렸다. 소설을 쓰면서 나 또한 인물이나 장소를 길게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뜨끔하면서 뭐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후로도 여기저기서 종종 이런 질문을 받으면서, 나는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소설가들은 왜 자꾸 길게 묘사를 늘어놓는 걸까?
그에 대한 답은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읽을 때 나왔다. 푹 빠져들어 읽었던 소설들 모두가, 묘사에 지면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었다. 인물이 어떤 몸짓을 하고 어떤 냄새를 풍기는지 자세히 알려줄수록 그 인물이 ‘진짜’처럼 느껴졌고, 그 진짜 같은 인물에게 감정이입하여 끝까지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니 소설가들의 묘사를 마법에 비유할 수 있으리라. 이런 이런 인물이 이런 이런 장소에 있다고 독자에게 주문을 거는 것이라고. 이 마법에 걸려든 독자는 자신을 잊고 이야기에 빠져들어 작가가 선사하는 한 세상을 종횡무진 누비다 올 수 있다.
협업의 차원에서 보면, 소설가가 소설 상의 인물과 장소와 기후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독자가 그 지루할 수도 있는 묘사를 공들여 읽어 내려가는 것은 양측이 상상의 세계에서 만나기 위해 맺는 투자 협정 같은 것이다. 소설을 즐겨 읽는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이 투자 협정을 받아들인다. 작가여, 좀 그럴싸하게 말해보게나. 그럼 내가 그것들을 진짜라 믿고 끝까지 들어줄 테니! 작가가 만들어놓은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 인물들이 낯설고 가짜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그건 가짜니까. 그러나 시간과 뇌력을 들여 묘사된 ...
2013년 장편소설 『모던하트』로 제18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잠실동 사람들』, 『맨얼굴의 사랑』,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에세이 『엄마의 독서』,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높은 자존감의 사랑법』,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 논픽션 『전두환의 마지막 33년』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