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적 급진성과 수학적 급진성

Orca
Orca · 제국에 관한 글쓰기
2024/03/24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은 쇤베르크라는 한 명의 인간, 한 명의 예술가가 수학적 착상이 다분한, 이성으로 만들어낸 작곡 방법론 상의 혁명이다. 이 기법을 사용해 작곡한 결과물들을 들어보면 도저히 음악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고, 많은 이들이 느낀다. 쇤베르크는 급진적이다. 

그런데 쇤베르크를 들을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그의 급진성은 다른 데서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선의 궁중아악을 들어보라. 아니면 아이누의 뭇쿠리 음악을 들어보라. 그것들은 우리가 익숙한 음악 어법과 급진적으로 다른 음악들이다. 쇤베르크가 귀에 익숙하지 않다면 저 “전통음악”들도 귀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므로 급진성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수학적으로 발명할 수 있는 급진성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과 비-인간들의 전통문화의 급진성이다. 후자를 인류학적 급진성이라고 불러보자. 수학적 급진성은 자신의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개인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며, 그런 무한한 자유를 잘 활용하기만 하면 개인이 전례 없이 새로운 창조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준다. 수학은 아주 철저한 반-휴머니즘이다. 수학에는 시세인정 때문에 안 되고 어쩌고 하는 변명이 조금도 발 붙일 수 없다. 이 점에 있어 수학의 철저함은 독보적이라고 본다. 인류가 만들어내고, 우리에게 오늘날 가용한 모든 수단 가운데 수학만큼 시세인정에, 원칙적으로 철두철미 무관심한 사유방법은 없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라는 이 원칙에 어긋난다면 부모형제, 군주와 황제, 심지어 공자나 부처, 예수가 오더라도 말릴 수 없다. 수학적 급진성은 시세인정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자신의 원칙 때문에 급진적일 수 있다. 수학적으로 증명만 되면 못할 짓이 없다. 솔개가 헤엄칠 수도 있고 물고기가 날아다닐 수도 있다. 무부무군은 물론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일 수 있다. 

전통 동아시아에는 수학적 급진성이 없었다. 예전에는 수학적 급진성이 없었던 게 서세동점의 한 원인이라고까지 생각했었다. 동아시아인들이 급진적이지 못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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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6년, 방공통제사 3년, 석사 생활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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