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 <에너미>에 나오는, ‘혼돈은 아직 해석되지 않은 질서다’라는 문구의 추종자이다. 이때의 ‘추종’은 <나의 해방일지>에 등장하는 ‘추앙’과 어느 정도 닮아 있다. 여기서 어느 정도, 라는 것은 ‘추종자’와 ‘추앙하는 사람’ 정도인데 멀다면 멀다고 할 수 있지만 가깝다면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여하튼 나는 최근, 추종할 것이 없고, 추앙하는 사람이 등장하는 드라마만 보고 있다.
“정키는 아현동의 아파트에서 친구 둘과 함께 살았다. 그중 하나는 한예종을 나와 영화나 드라마 스태프로 일하며 독립 잡지를 만드는 즤(Z)였는데 그는 지우의 옛 연인이었고 프랜과도 인연이 있었다. 프랜에게 영화 리뷰를 부탁했는데 프랜이 펑크를 낸 것이다. 자신의 글이 마음에 안 들기도 했지만 즤도 완전한 호감은 아니어서 마감을 얼레벌레 미룬 탓이다. 즤는 생소한 감독이나 사상가의 이름을 말하길 좋아했고 프랜이 좋아하는 영화를 형편없다고 하거나 프랜이 싫어하는 영화를 저평가된 걸작이라고 추켜올렸다.” (p.38)
감정이 결여된 세상, 감정 있는 것들을 낙오시키는 세상, 그래서 감정이 남아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