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혁현
오래된 활자 중독자...
책/영화/음악/아내/고양이용이/고양이들녘/고양이들풀/Spitz/Uaral/이탈로칼비노/박상륭/줌파라히리/파스칼키냐르/제임스설터/찰스부코스키/기타등등을 사랑... 그리고 운동을 합니다.
박라연 《아무것도 안 하는 애인》, 포옹은 용서이고 나지막한 사랑인데...
슈테판 츠바이크 《조제프 푸셰》, 영웅은 아니었지만 역사에 영향을 끼칠만큼 충분히 비겁하였던...
슈테판 츠바이크 《조제프 푸셰》, 영웅은 아니었지만 역사에 영향을 끼칠만큼 충분히 비겁하였던...
세계 3대 전기 작가 중의 한 명으로 불리우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을 좋아한다. (소설가로서의 츠바이크도 좋아한다) 그의 글을 십여 년 전에 마지막으로 읽었고 오랜만이다. 지금까지 츠바이크가 다룬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 마리 앙투아네트, 에라스무스, 매리 스튜어트, 세바스티안 카스텔리오, 아메리고 베스푸치, 발자크, 몽테뉴를 읽었다. (마젤란을 다룬 책도 있는데 아직 읽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제프 푸셰이다. “... 간단히 포착한 몇 개 안 되는 이력은 첫눈에도 한 사람의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제각각이다. 1790년에는 수도원의 교사였던 사람이 1792년에는 교회를 유린했고, 1793년에 공산주의자였던 사람이 5년 후에는 백만장자가 되었으며, 10년 후에는 오트란토 공작이 되었다... 근대 최고의 마키아벨리스트 푸셰가 이토록 대담하게 변신을 거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나는 더욱더 그의 성격에, 아니 그에게는 아예 성격이 없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지게 ...
인물과 장소만 있다면 마음껏... 정지돈,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리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
인물과 장소만 있다면 마음껏... 정지돈,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리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리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 『우리는 인종차별의 도시 파리에 있었다. 파리는 여성혐오의 도시이기도 하다. 파리는 산책자의 도시이다. 고로 산책자는 여성혐오자다. 사뮈엘 베케트는 파리 9구의 고도드모루아 거리에 있는 창녀촌을 자주 찾았다. 하루는 여자 하나가―아마 매춘부였겠지?―베케트에게 다가와 서비스를 이용할 거냐고 물었다. 베케트가 거절하자 여자가 비꼬는 투로 물었다. “그러시겠, 그럼 누굴 기다려요? 고도를 기다리시나?”』 (p.25) 이런 류의 유머들이 종종 등장하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읽을 수가 있었다.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에는 엠이 등장하고 여러 장소가 등장하다. (책의 표지에 정지돈 연작 소설집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누구여도 상관 없는 인물과 어떤 곳이든 장소만 주어진다면 어떻게든 소설을 쓸 수 있어, 라고 작가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아이는 ...
범인과 피해자와 살인의 동기를 밝히는 선전 포고로 시작되는... 루스 랜들, 《활자잔혹극》
범인과 피해자와 살인의 동기를 밝히는 선전 포고로 시작되는... 루스 랜들, 《활자잔혹극》
’유니스 파치먼이 커버데일 일가를 살해한 까닭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어지간한 자신감이 아니고서는 이와 같은 문장으로 소설을 시작할 수 없다. 장르가 추리 소설인데, 범인이 누구인지 피해자가 누구인지를 미리 밝히고 있다. 심지어 살인의 동기도 밝히고 있는데, 여기서 살짝 갸우뚱하게 된다. 그리고 첫 번째 챕터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하지만 여기에는 더 깊은 사연이 존재한다.‘ “이월 십사일 성 발렌타인 데이. 조지 커버데일, 재클린 커버데일, 멜린다 커버데일, 자일즈 몬트, 이상 네 명의 일가족은 불과 십오 분 사이에 모두 사망했다. 유니스 파치먼과 조앤 스미스라는 평범한 이름을 가진 여성이 일요일 저녁, 오페라를 보고 있던 커버데일 가족을 총으로 쏴 죽였다. 이 주 후 유니스는 이 범행으로 체포되었다.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p.9) 추리는 소설의 서두에서 끝이 나지만 또 시작되기도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이미...
편식하지 않는 비건주의자의 식단과도 같은... 김미옥,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편식하지 않는 비건주의자의 식단과도 같은... 김미옥,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읽을 책을 선별하는 일이 힘들다. 언제나 힘들었던 것은 아니다. 대학 신입생 시절에는 어렵지 않았다. 선배들이 권하는 책은 많았고 사용 가능한 돈의 액수는 아주 적었다. 빌릴 수 있는 것은 빌려 보고, 꼭 가지고 싶은 책은 점심값을 아껴 구매했다. 황지우, 장정일, 정희성, 신경림, 황동규 등의 시집과 최인훈, 윤흥길, 전상국, 조세희 등의 소설, 《철학이야기》, 《강철서신》, 《해방전후사의인식》, 《베트남전쟁》등의 서적을 그때 샀다. “... 인종은 우리가 인식하기 때문에 실재하고 인종차별주의는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에 실재한다. 이 모두가 과학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인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리상의 땅덩어리, 또는 피부 색소에 불과한 신체 특징이다.” (p.112)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좀더 수월하게 책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때는 애인이었던 지금의 아내가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를 다니고 있었는데, 그녀로부터 오규원, 김혜순, 남진우, 하재봉 등의 선생...
진짜 소통의 안에서 소소한 행복감으로 살고 싶은데... 장석주, 《마흔의 서재》
진짜 소통의 안에서 소소한 행복감으로 살고 싶은데... 장석주, 《마흔의 서재》
출판사를 바꿔 출판되기 이전 《마흔의 서재》는 2012년에 첫선을 보였다. 당시라면 나의 나이가 마흔세 살이고, 그때 읽었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느낌으로 책에 실린 글을 읽지 않았을까 넘겨 짚어본다. 그때로부터 십여 년이 더 흘렀고, 나는 조금 띄엄띄엄 글을 읽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는데, 그런데 그게 너무 알겠어서, 덜 와닿는다고 하면 말이 될까. 십여 년 더 나이를 먹었더니,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좀더 하게 되고 말았다. “문제는 과다한 노동과 성과가 결국은 자기 착취로 이어진다는 것, 이것들은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성과주체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는 점이다. 한병철의 통찰은 날카롭다.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판단과 선택에 의해 과잉노동을 하며 자기 착취를 한다는 것이다.” (p.45) 그러니까 한병철의 《피로사회》만 해도 그렇다. 당시의 나는 ’외부의 강제‘ 없이 알아서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성과주체‘라는 개념에 꽤나 혹하...
버전업의 가능성을 가늠하며 읽는... 정이현 임솔아 정지돈, 《사랑, 이별, 죽음에 관한 짧은 소설》
버전업의 가능성을 가늠하며 읽는... 정이현 임솔아 정지돈, 《사랑, 이별, 죽음에 관한 짧은 소설》
세 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데 각각의 소설에 부제가 달렸다. 각각 정이현의 〈우리가 떠난 해변에〉는 ’사랑에 관한 짧은 소설‘, 임솔아의 〈쉴 곳〉은 ’이별에 관한 짧은 소설‘, 정지돈의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에는 ’죽음에 관한 짧은 소설‘이라는 부제이다. 부제를 보고 크쥐시토프의 키에슬로프스키가 TV 시리즈인 《십계》 중 두 편(살인하지 마라, 와 간음하지 마라)을 버전 업 하여 극장판으로 만든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과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이라는 제목이 퍼뜩 떠올랐다.
정이현 「우리가 떠난 해변에」 설과 주영, 그리고 선우... “모든 멈춘 것은 퇴색하고 틈이 벌어지고 낡아간다. 움직이지 않는 바위는 제자리에서 조금씩 바스러지고 있다. 어느 날 회색 재로 풀썩 무너져 내려 실체조차 없어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사랑도 언젠가 그처럼 소멸하리라는 희망만이 그동안 설을 버티게 했다.” (pp.34~35) 모두 읽고 생각해보니 등장 인물들의 이름에서 명확하게 성별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의 저 너머... 켄 리우, 《은랑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의 저 너머... 켄 리우, 《은랑전》
“한 사람의 작가로서, 나는 상상할 수 없는 미래의 모든 거주자를 만족시킬 집을 짓는 것은 힘에 부칠뿐더러 답답하고 막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차라리 나 자신이 현실과 언어로 지은 인공물 사이의 공감대에 위로받으며 아늑하고 평온하다고 느끼는 집을 짓는 편이 훨씬 더 낫다. 그럼에도, 내 경험에 비춰 보면 소통하려는 의도가 가장 약할 때 내놓은 결과물에 오히려 해석할 여지가 가장 많았고, 독자에게 위안을 전하려는 배려가 가장 적을 때 도리어 이야기를 자기 집으로 삼는 독자들이 가장 많았다. 순전히 주관적인 것에만 집중할 때 비로소 상호 주관적인 것을 얻을 기회가 생긴다.” (p.10, 〈서문〉중) 「일곱 번의 생일」 일곱 살의 나, 마흔아홉 살의 나, 343세의 나,―“이제 이 행성에는 3000억이 넘는 인간의 의식이 거주한다. 그들은 다 합쳐도 옛 맨해튼보다 더 작은 데이터 센터 수천 곳에 모여 산다. 외딴 정착지에서 육신을 지니고 살아가기를 고집하는 소수의 완고...
극단의 딜레마와 이율배반으로 가득한 극치의 플롯과 캐릭터... 존 어빙, 《가아프가 본 세상》
극단의 딜레마와 이율배반으로 가득한 극치의 플롯과 캐릭터... 존 어빙, 《가아프가 본 세상》
“에필로그는 단순한 시체 확인이 아니다. 에필로그는 과거를 청산한다는 형태로 사실은 우리들에게 미래에 관해서 하는 경고이다.” (p.347, 2권) 모두 열아홉 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소설에서 열아홉번 째 챕터인 〈가아프 이후의 삶〉은 소설의 에필로그에 해당한다. 소설의 화자인 가아프를 낳은 제니 필즈도, 그리고 가아프 자신도 떠난 다음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이다. 소설을 모두 읽은 즈음인 그때,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몇 페이지만으로도 소설 하나쯤은 너끈하게 쓸 수 있을 것이야, 라고 나는 탄식했는데, 소설은 그만큼 나무랄데없이 흥미진진하였고, 여지없이 흥미로운 인물들로 가득하였다. “그리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의지력을 지녔던 훌륭한 간호사와, 선회 포탑의 사수가 최후로 발사한 씨앗으로부터 가아프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p.46, 1권) 극심한 부상으로 정신이 없는 가아프를 통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아버지 없는 아이를 잉태한 제니 필즈와 그렇게 태어나 소설가가 된...
매일매일 벌어지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김훈, 《허송세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