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장소만 있다면 마음껏... 정지돈,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리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
인물과 장소만 있다면 마음껏... 정지돈,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리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리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 『우리는 인종차별의 도시 파리에 있었다. 파리는 여성혐오의 도시이기도 하다. 파리는 산책자의 도시이다. 고로 산책자는 여성혐오자다. 사뮈엘 베케트는 파리 9구의 고도드모루아 거리에 있는 창녀촌을 자주 찾았다. 하루는 여자 하나가―아마 매춘부였겠지?―베케트에게 다가와 서비스를 이용할 거냐고 물었다. 베케트가 거절하자 여자가 비꼬는 투로 물었다. “그러시겠, 그럼 누굴 기다려요? 고도를 기다리시나?”』 (p.25) 이런 류의 유머들이 종종 등장하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읽을 수가 있었다.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에는 엠이 등장하고 여러 장소가 등장하다. (책의 표지에 정지돈 연작 소설집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누구여도 상관 없는 인물과 어떤 곳이든 장소만 주어진다면 어떻게든 소설을 쓸 수 있어, 라고 작가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아이는 ...
끊임없이 의구심 품게 만드는 인물, 저자, 책의 향연... 정지돈, 《내가 싸우듯이》
끊임없이 의구심 품게 만드는 인물, 저자, 책의 향연... 정지돈, 《내가 싸우듯이》
「눈먼 부엉이」 “우리는 집 안 곳곳에 산재해 있는 장의 책을 모조리 뒤졌지만 ‘투명한 아름다움이 빛나는’ 책 따위는 찾지 못했다. 에리크는 옷과 책과 곰팡이로 난장판인 작은 방을 가리키며 손님방이냐고 했다. 나는 ‘노’라고(분명 ‘노’라고) 대답했는데, 에리크는 괜찮다고 하더니 짐을 풀었다. 나는 뭐가 괜찮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지만 어쨌든 짐 푸는 걸 도왔다.” (pp.18~19)작가의 소설을 읽다보면 이런 정도의 유머에도 꽤나 크게 웃게 된다. 그건 그렇고 소설에서 거론되고 있는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를 나는 《눈먼 올빼미》라는 제목의 책으로 읽었고, 책의 정장이 인상적이었다는 그리고 손에 꼽을 만한 인상적인 문장으로 가득했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 「뉴욕에서 온 사나이」 “나는 기억을 잃어버렸다. 뉴욕에서 귀국한 날에 교통사고가 났고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의사는 기억의 일부가 손상되었으며, 그중 일부는 돌아올 것이고 일부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
'솔직히 말하면' 여러 문장의 시니컬한 인식에 혹하여... 정지돈,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솔직히 말하면' 여러 문장의 시니컬한 인식에 혹하여... 정지돈,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솔직히 말하면 나는 금정연과 오한기가 없으면 글을 못쓴다. 고다르는 없어도 상관이 없다. 늙은, 백인, 이성애자, 남성, 영화감독이 있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인가. 그의 영화나 말이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그가 없는 다른 평행우주에서도 그와 유사한 무언가가 내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금정연과 오한기가 없는 평행우주는 상상할 수 없다. 그곳은 우주가 아니다. 그곳은 영혼을 잃은 빈 껍데기, 앙꼬 없는 찐빵······ 〈기묘한 이야기〉가 없는 넷플릭스와 마찬가지다(여담이지만 〈기묘한 이야기〉 시즌3는 별로였다······).” (p.19)‘솔직히 말하면’ 이라는 서두로 시작하는 문장 치고 솔직한 것이 별로 없다, 라는 것은 나의 아내의 지론이다. 그래서 ‘사실’, ‘솔직히’ 라는 부사를 내가 사용하면 아내는 나를 흘겨 본다. 나도 아내에게 물이 들어 이러한 부사가 들어간 문장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이라는 시작에도 불구하고, 작가 정지돈이...
정웰링턴과 정지돈이 바통을 주고 받으며 체코에서 체코로... 정지돈, 《모든 것은 영원했다》
정웰링턴과 정지돈이 바통을 주고 받으며 체코에서 체코로... 정지돈, 《모든 것은 영원했다》
정지돈의 소설 《모든 것은 영원했다》는 한국 근현대사 속의 한 인물인 현앨리스를 통하여 그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낸 인물들을 조망하고자 한, 정병준의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 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이라는 책을 통해 비로소 가능했을 것이다. 정웰링턴은 현앨리스의 아들이지만 이 책에서 많은 부분이 할애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 책은 현앨리스의 조부모로부터 아들인 정웰링턴에 이르는 4대를 다루어야 했다.“정웰링턴은 하나의 삶을 가지지 못했고 하나의 국가도 가지지 못했다. 정웰링턴을 아는 사람은 대부분 그를 오해하거나 경계했고 사랑해도 일부분만 받아들였다. 그에게 필요한 것을 아무도 그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p.7)작가 정지돈은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을 읽고 정웰링턴의 생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다,라고 말해야 하겠지만 무슨 연유인이 알 것도 같다,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정웰링턴의 삶이 갖는 유별난 개별성이 작가를 자극했을 것이라고 짐작...
과거 회귀를 불허하는 과거 회상에 적합한 독서를 연달아... 정지돈, 《영화와 시》
과거 회귀를 불허하는 과거 회상에 적합한 독서를 연달아... 정지돈, 《영화와 시》
대학교 일학년 때 수다와 침묵 사이의 택일, 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제목만 있고 본문은 없는 시였다. 황지우와 장정일을 넘어 박남철을 탐독하던 시기였다. 선배들에게 크게 욕을 먹었다. 대학로의 씨앙씨에에서 미클로사 얀초 감독의 <붉은 시편>을 보고, 비디오 테이프로 피에르 파올로 파졸로니 감독의 <살로 소돔의 120일>과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 태엽 오렌지>를 보았다. 동생이 영화과에 진학했다.“일반적으로 다음 네 가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나와 맞지 않는다. 애국심, 애향심, 애교심, 애사심. 그래서인지 대구 출신인 나는 대구에 사는 게 힘들었고(대구는 애향심의 도시다, 특히 수성구 사람들의 지역에 대한 자부심은 인류학적 연구 대상이다) 대학교를 다니는 게 힘들었으며(과 잠바는 지구의 오물이다) 회사 간부들과 의견이 맞지 않았고(회사가 잘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람) 한국에서 사는 게 힘들다...” (p.59)정지돈의 《영화와 시》를...
같은 색으로 잘 정돈된 큐브처럼 해석되는 현대 사회의 반대 방향으로 스크롤... 정지돈, 《···스크롤!》
같은 색으로 잘 정돈된 큐브처럼 해석되는 현대 사회의 반대 방향으로 스크롤... 정지돈, 《···스크롤!》
“메타북스에 처음 온 사람은 누구나 그 규모에 놀란다. 메타북스가 속한 복합 콤플렉스 단지인 메타플렉스는 용산에 있지만 용산보다 규모가 크다. 건축과 지정학, 지질학, 4D 메핑, GIS, 메타피직스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면 의문을 가질법하다. 부분이 전체보다 크면 어떻게 부분이 전체에 속할까. 이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오는 착각이다. 우리의 감각과 지각은 자연의 실제 모습을 볼 수 없게 만든다. 당신이 포티니 마르코폴루칼라마라의 토포스 이론에 대해 안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p.24) 나는 영화 <에너미>에 나오는, ‘혼돈은 아직 해석되지 않은 질서다’라는 문구의 추종자이다. 이때의 ‘추종’은 <나의 해방일지>에 등장하는 ‘추앙’과 어느 정도 닮아 있다. 여기서 어느 정도, 라는 것은 ‘추종자’와 ‘추앙하는 사람’ 정도인데 멀다면 멀다고 할 수 있지만 가깝다면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여하튼 나는 최근, 추종할 것이 없고, ...
찌그락짜그락 하면서도 조금은 해소되는 갑갑함 덕에...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
찌그락짜그락 하면서도 조금은 해소되는 갑갑함 덕에...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
“이것은 밤의 도시에 대한 이야기다. 매알 밤 도로 위를 떠도는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며 여성 혐오와 가난에 대환 이야기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두 문장으로 줄일 수 있다. 다 끝났어. 돈 때문에 하는 거야. 이 이야기는 한 문장으로 줄일 수도 있다. 그것을 실현하지 않고 그것을 하는 것.” (p.9) 소설은 서울스퀘어(옛 대우빌딩이 이제는 이런 이름으로 불리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에서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는 ‘나’의 블로그 글에 기반한다. ‘야간 경비원의 일기’라는 소설의 제목은 이렇게 적는 블로그 글 중 ‘야간 경비원의 일기’라는 동일한 제목을 붙인 게시물에서 따온 것이다. 블로그에는 그러니까 소설에는 이외에도 ‘공유’, ‘새해 목표’, ‘완전한 일상’과 같은 제목의 글 그러니까 게시물이 나열되어 있다. “말하고 나니 그럴듯한 것 같기도 하고 궤변인 것 같기도 했다. 하나 마나 한 말인 것 같기도 하고 필요한 말인 것 같기도 하고, 말하기...
미래는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정지돈,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미래는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정지돈,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수수께끼보다는 스무고개를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단박에 알아맞히지 못한다면 그것으로 끝이 나는 수수께끼가 던지는 열패감은 싫었다. 스무고개는 기민하지 못하여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제공되는 실마리가 나쁘지 않았다. 좌절의 순간을 뒤로 미룰 수 있었고 그로 인하여 고조되는 긴장감 자체도 일종의 오락거리가 되었다. 물론 열아홉 번의 오르막을 거치고도 목적지를 잃고 방황하기 일쑤였지만... “지방은 위험하다. 그러니까 돈을 많이 주겠지. 짐은 생각했다. 서울을 떠나는 순간 벌집이 될지도 모른다.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에 들렀다가 차량을 탈취당하고 무릎이 꿇린 채 뒤통수에 총알이 박힐지도 모르고 도로에 설치된 지뢰나 크레모아에 의해 산산조각 날지도 모른다. 볼일이 급해 국도에 차를 세우고 벌판으로 달려가다 저격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죽었다는 사실도 모르겠지. 아픈지도 모르고 슬픈지도 모르고 억울하지도 않을 것이다. 죽음의 유일한 장점은 남들은 알지만 자신은 모른다는 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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