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7월 10일 구보 박태원 사망
2023/07/10
1986년 7월 10일 구보 박태원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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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등학교 국어 시간은 이상했다. 현대문학사를 배우면서 KAPF는 시험에 자주 나올만큼 중요한 문학단체였는데, 정작 KAPF의 문학 작품을 읽을 기회는 없었다. “잃어버린 것은 예술이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라는 한때 KAPF의 주도자였던 박영희의 회심 고백은 마르고 닳도록 인용되어 ‘박영희’는 아는데 그의 작품은 절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구인회’라는 문인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분명히 아홉 명의 문인들로 구성된 모임일 텐데 거기서 필요한 이름은 이상, 이효석, 김유정, 유치진 정도였다. 그 외 다른 이름들은 공부할 필요도 없었다. 시험에 안나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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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회의 구성을 보면, 그 이름대로 아홉 명의 회원은 지켜졌지만, 그 아홉 명이 꾸준했던 건 아니다. 처음에는 발기인이었던 이종명, 김유영을 비롯해서 이효석, 이무영. 유치진, 조용만, 이태준 김기림이 구인회였고 이후 이종명 김유영, 그리고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효석이 탈퇴했고 그 뒤를 이은 것이 박태원, 이상 박팔양이다. 그리고 그 뒤에 두 명이 탈퇴하면서 김유정이 처음으로 얼굴을 디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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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구인회는 경향문학 즉 요즘 말로 하면 참여 문학, 또는 이데올로기 문학에 반대하여 순수문학(?)을 주창하는 모임이었다. 그리고 구인회가 단체로서 영향을 미친 바는 적으나, 그 구성원 개개인이 쟁쟁한 문인들이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위치는 지대하다 하겠다.
구보 박태원도 그 중의 하나였다. 1930년 <신생>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그는 반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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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등학교 국어 시간은 이상했다. 현대문학사를 배우면서 KAPF는 시험에 자주 나올만큼 중요한 문학단체였는데, 정작 KAPF의 문학 작품을 읽을 기회는 없었다. “잃어버린 것은 예술이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라는 한때 KAPF의 주도자였던 박영희의 회심 고백은 마르고 닳도록 인용되어 ‘박영희’는 아는데 그의 작품은 절대로 소개되지 않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구인회’라는 문인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분명히 아홉 명의 문인들로 구성된 모임일 텐데 거기서 필요한 이름은 이상, 이효석, 김유정, 유치진 정도였다. 그 외 다른 이름들은 공부할 필요도 없었다. 시험에 안나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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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회의 구성을 보면, 그 이름대로 아홉 명의 회원은 지켜졌지만, 그 아홉 명이 꾸준했던 건 아니다. 처음에는 발기인이었던 이종명, 김유영을 비롯해서 이효석, 이무영. 유치진, 조용만, 이태준 김기림이 구인회였고 이후 이종명 김유영, 그리고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효석이 탈퇴했고 그 뒤를 이은 것이 박태원, 이상 박팔양이다. 그리고 그 뒤에 두 명이 탈퇴하면서 김유정이 처음으로 얼굴을 디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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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 구인회는 경향문학 즉 요즘 말로 하면 참여 문학, 또는 이데올로기 문학에 반대하여 순수문학(?)을 주창하는 모임이었다. 그리고 구인회가 단체로서 영향을 미친 바는 적으나, 그 구성원 개개인이 쟁쟁한 문인들이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위치는 지대하다 하겠다.
구보 박태원도 그 중의 하나였다. 1930년 <신생>에 단편 소설 ‘수염’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그는 반계...
사학과는 나왔지만 역사 공부 깊이는 안한 하지만 역사 이야기 좋아하고 어줍잖은 글 쓰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입니다.
@살구꽃 분단의 비극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거 같습니다.....
처자를 남기고 단신 월북하는 박태원, 처자와 부모를 남기고 단신 월남한 아버지 생각이...;;
봉준호감독 얘기는 알고 있었지만 이 글로 다시 읽으니 새삼 감회가 새롭습니다. 박태원이 아이들 이름을 부르는 사무치는 그리움은 제 아버지의 마음을 보는 것 같군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