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에서 향기가 난다

토마토튀김
2024/07/21
모임이 이루어지자 서로 약속하기를...
“살구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복숭아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차례 모이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 서지(西池)에 연꽃이 피면 구경하기 위해 한 차례 모이고, 국화꽃이 피어나면 한 차례 모이고, 겨울에 큰 눈이 오면 한 차례 모이고, 세밑에 화분의 매화가 피면 한 차례 모인다.

아들을 낳으면 한턱 내고 고을살이를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또 한턱내고 벼슬이 승진한 사람도 한턱 내고 아우와 아들 중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있어도 한턱내도록 한다" 라고 규약을 정했다.

<죽란시사첩 서> - 다산 정약용


윌라의 오디오북에서 <제철 행복>이라는 책을 들었다. 무조건 예쁜 문장이 너무 번들거려 눈에는 잘 들어오지는 않는 와중에 빽빽 외치는 '나는 행복합니다' 류의 느리고 예쁜 책, 잘 꾸민 카페 같은 책과 잡지 너무 싫어하는데, 왠지 요즘엔 나 마음에 예쁜 정원 하나 흙 갈아서 만들어봐야겠다는 심산으로 잡은 책이다. 혹은 작은 토마토라도 열릴 텃밭 같은 느낌으로... 
그중 단연코 내 귀에 콕 박힌 것은 정약용 선생의 '죽란시사'라는 모임의 약속 내용이었다. 나 같이 성질이 똑 떨어지는 것 좋아해서 시간과 날짜 딱딱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약속이지만...  약속에서 향기가 난다. 
이 바쁘고 풍진 세상에서 "다음 주면 자목련이 활짝 피겠네? 모이자!" 혹은 "겹벚꽃이 이제 만발한단다. 모여라!" 하면서 좋은 술과 안주들을 정성껏 준비해서 모이는 것도 사람 사는 맛 아닌가 하고 잠시 상상해 봤다. 

아마 다들 어린 시절, '첫눈 오면 어디에서 만나' 이런 약속들 해보셨을 것이다. 나도 지금까지 한 대여섯 번은 첫눈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약속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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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먹으며 글을 씁니다. 에세이집 <시나리오 쓰고 있네>, <아무 걱정 없이 오늘도 만두>, <어쩌다 태어났는데 엄마가 황서미>를 발간했습니다. 지금은 드라마와 영화 시나리오를 씁니다. 몰두하고 있습니다. 일 년 중 크리스마스를 제일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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