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넘실대며" - 민관이행기의 연등회
2023/07/13
민관이행기의 연등회 - 연등회의 역사와 흐름
민관이행기(民官履行期, 民官移行期)는 2기로 나눌 수 있다. 1기는 조선 세종 13년(1431) 실질적인 상원 연등회 폐지 이후부터 대한제국기까지이며, 2기는 일제강점기이다. 이 시기는 4월 초파일 연등회로 정착되는 시기이자 왕실로 대변되는 관 중심에서 민간 중심으로 옮겨가는 시기이다. 왕실에서의 개별적 연등회는 계속되었으나 민간에서 유희성이 강화된 축전으로 더욱 널리 설행된다. 일제도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초파일 행사를 조선인과 공동으로 설행하기도 한다.
세종 13년(1431) 연등회의 금지 하교 후 24년이 지난 세조 1년(1455)에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梁誠之, 1415〜1482)가 상소하여 예법은 본국의 풍속을 따라야 한다고 하면서 연등도 불가할 것이 없다고 하고 있다. 이어 세조 9년(1463) 4월 9일에는 “충순당(忠順堂)에서 관등을 하니, 종친과 재추가 모시었다.”는 기사와 13년(1467) 4월 8일에는 “원각사 탑을 이루고 연등회를 베풀어서 낙성하였다.”는 기사가 보이고 있다.
연산군 4년(1498) 4월 8일에는 사족(士族)의 부녀들이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재궁(齋宮)에 모여 관등을 하였다는 기사와 월산대군 부인 박씨가 도성 안의 사대부집 부녀들을 모아 흥복사에서 관등놀이를 하였다는 기사로 보아 부녀자들도 관등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연산군 12년(1506) 4월 12일에는 왕이 경회루에 올라가 만세산에 청란(靑鸞)ㆍ자봉(紫鳳)ㆍ연화(蓮花)ㆍ모란[牧丹]ㆍ고소대(姑蘇臺)ㆍ봉래산(蓬萊山)ㆍ금오(金烏)ㆍ옥토(玉兎)ㆍ은즉(銀鯽)ㆍ황룡(黃龍) 등의 등(燈)을 관등하고 잔치를 벌였다고 하고 있다.
이후 인조 13년(1635) 4월 8일에는 오색 비단으로 만든 연등 수백 개를 후원에 달아놓고 놀았다는 기사가 보인다. 또한 영조 42년(1766)에는 자신의 병으로 연...
@연하일휘 답이 늦었습니다. 억불숭유 정책 하에서도 왕가와 민가에서 불교는 고루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죠. 감사합니다.
@클레이 곽 답이 늦었습니다. 과찬입니다. 감사합니다.
숭유억불 정책이라 칭하면서도, 결국 완전하게 억제하지 않은 것이 불교. 그 증거가 연등회라고 하였었죠. 그 시기의 연등회는 과연 어떤 정경이었을까 궁금해지곤 합니다:) 다음 글도 두근두근, 기대하며 기다립니다!!
이제보니 서평가가 아니시고, 역사학자이십니다. 셀 수 없는 그 독서량은 어디에서 오는것이며, 그 학문의 끝없는 박학다식은 어디에서 오는것입니까!!! 그저 절로 고개를 숙이게 하시는 그 힘에 겸손을 가르쳐주셔서 한 없이 감사드리며, 존경합니다.
숭유억불 정책이라 칭하면서도, 결국 완전하게 억제하지 않은 것이 불교. 그 증거가 연등회라고 하였었죠. 그 시기의 연등회는 과연 어떤 정경이었을까 궁금해지곤 합니다:) 다음 글도 두근두근, 기대하며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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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일휘 답이 늦었습니다. 억불숭유 정책 하에서도 왕가와 민가에서 불교는 고루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죠. 감사합니다.
@클레이 곽 답이 늦었습니다. 과찬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