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불균형 사회(3) : 본인인증의 덫

박하
박하 인증된 계정 · 배낭여행자
2023/01/04


페루 와라즈에 있을 때였다. 은행 계좌가 갑작스레 막히는 바람에 나는 내 돈을 못 쓰는 상황에 닥쳤다. 오류번호를 이용해 조회해보니 ‘해외결제 도용의심’이라는 가당치 않은 이유로 예고없이 내 계좌를 막은 것이었다. 벌써 출국 후 1년이란 시간이 지난 터였고, 당시 금융업무를 위해 필수불가결하던 공인인증서도 제때 갱신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여태 아무 말도 없다 갑자기 말이다. 이런 일이 생길까 해외 결제 신청도 잘 해뒀는데 어째서? 매크로와 다름없는 은행의 답변은 그랬다. “가까운 지점으로 방문하세요”

1년을 훌쩍 넘는 기간 정도의 여행을 하는 장기여행자라면 으레 한국의 번호따위 없다.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개인번호의 일시정지 기간은 6개월이 최장기간이고 그 이후에는 통신료를 동일하게 지불해야 번호가 유지된다. 여행자는 결코 낭비되는 비용을 용납하지 않는다. 우연인지 누락인지 나는 번호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으나, 해당 번호를 되살리기 위해서도 결국 통신사 지점을 방문해야만 했다. 정말이지 우스운 일이었다. 해외 출국사실을 조회하는 건 은행에서 가능한 업무였지만, 은행에서 연동된 계좌를 ‘본인’이라 확인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휴대폰 본인인증말고는 없었다.

나는 사실 잘 몰랐다. 아니, 너무 잘 알았다. 휴대폰이 없으면 더는 한국사회에서 국민이라는 인정을 받지 못할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인터넷 속도가 세계 어느 곳보다 빠른 걸 자랑스러워하는 국가는 정서조차 빠른 탓에 오프라인의 증명서 따위를 받을 시간은 주지 않는다. 그래서 대안이랍시고 내놓은 ‘아이핀’따위를 만들어두고도 왔는데 트래픽과 핑을 보아하니 한국말곤 영원히 로그인되지 않을 것 같다. 유효기간도 짧고 말이다. 거기다 모든 걸 갱신할 날짜를 기억하는 건 공인인증서로 족했다.

한국, 서울 (202...
얼룩패스
지금 가입하고
얼룩소의 모든 글을 만나보세요.
이미 회원이신가요? 로그인
박하
박하 인증된 계정
배낭여행자
이 곳 저 곳을 떠돌며 살고 있습니다. 아직 어느 곳에도 주소지가 없습니다. <아무렇지 않으려는 마음>, <워크 앤 프리> 두 권의 책을 냈습니다.
39
팔로워 249
팔로잉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