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matic Humanism
2024/03/25
만물을 그것이 살아갈 수 있게 다소 놔둬야 한다는 주자학의 여유는 모노노아와레와 비슷한 듯 하지만, 주자학에는 아와레(애처로움, 애상감, 슬픔, 가라앉는 마음)가 없다. 아와레는 어디서 오는 거냐면, 모든 것이 이상적이기 위해서 내가 모노에 다가갈 수 없다는, 지켜볼 수밖에 없는 마음이 아와레가 되는 것인데, 중국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만물과 자신 사이의 분리는 자각되지 않는데 왜냐면 바람이 불고 그 속에 만물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국 사람들은 좀 놔둬야, 적절히 죄어주고 적절히 풀어줘야 그것이 살 수 있고, 그게 살 수 있어야 나한테로 올 수 있으며, 반드시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모든 것은 생생무궁하며, 만물이 상관하며 천하의 기는 유유히 흐르기 때문이다. 천인합일이란 이런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가장 원리주의적인, 교조적인 주자학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유교 탈레반이라는 말이 아마 유교권에서 유일하게 통용되는 나라일 지 모른다. 그런데 동시에, 한국인들은 한중일 삼국 가운데 중국인도 일본인도 인정하는, 음주가무(武도 포함하여)에 가장 능한 민족이 되어 있다. 한국의 민족예술은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듯이, 즉흥성이 우수하고, 정적인 체계보다 동적인 변화생성을 중시하며, 맺고 푸는 흐름의 굴곡 속에서 어떤 다이나미즘을 표현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 유독 세계적으로 음주가무에서 두드러지는 카리스마를 발휘했던 동아시아인 중에는 조선인이 많았다. 러시아에서 어떤 일본인이, 어떤 중국인이 빅토르 최 같은 반열에 들 수 있었나? 빅토르 최 같은 음유시인들이 또 한국에는 당시에 얼마나 득시글거리고 있었는가?(그의 음악은 신중현과 김광석을 연상시킨다)
한국의 미학에는 중국적 황폐함, 살풍경은 없다. 황폐함, 살풍경으로 치자면 한국은 중국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중국에는 없는 풍류가 한국에는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제아무리 주희라고 하더라도 도가나 법가, 불교, 묵가 같은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