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앓는 데 소요되는 인간의 영성 : 플레이리스트 [문명화된 야만]

김터울
김터울 · 연구자, 활동가, 게이/퀴어.
2023/11/13
1.

플레이리스트 '문명화된 야만'은 레닌이 영국 자본주의를 일컬어 부른 표현에서 따왔다. 연구자와 활동가들은 PTSD에 시달릴 법한 많은 현장들을 보며 지내고, 사회 속 모든 구조와 위계에 시달리는 현장과 당사자를 보는 일은 당연히 사람의 신경이 갈리고 그만한 정동이 따라붙는 일이다. 그걸 노래에 기대서라도 한번 풀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첫 트랙은 영화 <한니발>(2001) 사운드트랙의 삽입곡 'Vide Cor Meum(내 마음을 보라)'로, 영화를 위해 한스 짐머와 아일랜드 출신 작곡가 패트릭 캐시디가 새로 작곡한 오페라 아리아다. 극도로 유미주의적이면서, 영화가 다루는 잔혹이 다름아닌 그 유미주의가 탄생한 피렌체의 중세에서 나왔음을 암시하기에 주제와 들어맞는 선곡이다.

그렇다면 20~21세기 한국으로 돌아와 그 못볼 꼴의 첫머리에는 무엇이 놓이면 좋을까. 현대 한국의 도농 격차와 계급 격차, 그리고 그걸 가로지르는 젠더 위계를 모두 다룬 MBC 드라마 <아들과 딸>(1992)의 목가적인 메인 타이틀이 거기에 적절했다. 목가적인 공동사회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과 거기 바깥에서 일어나는 이익사회의 끔찍한 일과의 부딪침이 곧 한국현대사의 팔할이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최초로 경유해온, 일제 강점기 때의 절명시인 함형수의 시에 곡을 붙인 '해바라기를 심어다오'를 넣었다. 민중가요와 동요를 두루 작곡한 백창우의 작품으로, 교과서에 나오는 시와 헌법 전문에 써있는 제국·식민 위계의 정동을 이제와 새로이 되새길 트랙이 꼭 필요했다.
그 다음은 조금 쑥스럽지만 MBC 드라마 <서울의 달>(1994)의 삽입곡 두 곡을 골랐다. 한 음반에 두 개의 곡을 연달아 넣는 것이 끝내 망설여졌지만, 이 플레이리스트의 주제에 두 곡이 찰떡처럼 어울려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국의 이촌향도 문제는 과거 지상파 3사의 드라마들이 단골로 다루던 한국 사회의 핵심적인 정동이었고 지금도 얼마간 그렇다.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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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조건을 묻다』(숨쉬는책공장,2015), 『세상과 은둔 사이』(오월의봄,2021), 『불처벌』(휴머니스트,2022,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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