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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받습니다] 평론가? 시민? ‘그냥’ 쓰는 위근우!
2023/11/10
대중문화평론가라는 직함으로 이런저런 글을 쓰고 있는 위근우입니다.
굳이 ‘직함’이라 부연한 건, 평론가라는 것이 제 작업의 어떤 본질을 이룬다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입니다. 대중문화평론가라는 직업은 처음 등장했던 19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에도, 또 현재까지도 정확히 뭘 하겠다는 건지 어딘가 미심쩍은 이름입니다. 다만 직함이 없으면 호칭 자체를 껄끄러워하는 한국 사회에서 반백수 비정규 마감노동자가 스스로에게 붙이기엔 그럴싸한 직함이기도 합니다.
그 외 꽤 오랜 시간 대중문화 전문 웹매거진에서 기자로 활동했던 경력 덕에 아직도 기자라는 호칭으로 불러주는 이들도 있고, 6년째 <경향신문>에 격주로 칼럼을 쓰는 덕에 칼럼니스트라는 호칭으로도 불립니다. 반백수 기간에도 책을 몇 권 냈는데, 책을 내서 좋은 건 세상의 어떤 놈팽이도 대충 작가라는 직함을 쓸 수 있기 때문이죠. 평론가, (전직) 기자, 칼럼니스트, 작가, 어쨌든 이 모든 직함은 글을 쓴다는 행위로 소급하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으로 평론가나 작가 등으로 호명됐을 때 그 호명에 내가 응할 때 상대가 기대하는 것, 내가 글로써 수행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종종 고민합니다. 중요한 건 어떤 직함을 수행하든 제게 있어 글을 쓴다는 건 공론장에 글을 기입하는 것이라는 공통의 맥락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지난 10월 말, 남현희 씨에 대한 사기 결혼 이슈로 유명해진 전청조가 다른 사기를 위해 문자에 쓴 “I am 신뢰에요”란 우스꽝스러운 표현이 일종의 밈으로 활용된 바 있습니다. 심지어 기업 마케팅에서도 사용했고요. 저는 그에 대한 기사를 인스타그램에 공유하며 꽤 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사기꾼이 사기를 위해 쓴 말을 단지 웃긴단 이유로 무비판적으로 사용해도 될지, 적어도 기업과 방송에선 지양해야 하지 않는지 질문했습니다. 이미 주말 예능인 <1박2일>과 <런닝맨>에서 사용하게 됐다는 걸 알게 된 건 그 후였고요. 그 후 제 인스타그램 피드는 여타 연예기사에 인용되어 소신 발언, 일침 같은 말들로 소비되었습니다. 그러다 충주시 유튜브 공식 홍보 영상에도 사용된 걸 알고 강한 어조로 비난했는데 그것 역시 기사화가 되더군요.
모든 게 부담스럽지만, 그 와중에 전청조 밈에 대한 비판적 논조의 기사가 나오고 제가 쓴 글이 인용될 땐 조금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제 이름이 언급되어서, 혹은 제 의견이 옳다는 인정을 받아서가 아닙니다. 모두가 전청조 밈을 쓰는 와중에 ‘과연 그래도 될까?’라는 여론이 작은 목소리로나마 구체적 형태로 응집되었기 때문이죠. 최종적으로 전청조 밈 사용에 대한 우려가 과한 것이었다고 결론 나더라도 아무 문제의식 없이 쓰는 것보다는 한 번쯤 논의를 하며 밈 사용의 윤리적 차원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길 바랐습니다.
@gongbaek 안녕하세요. 질문주신 것에 대해 답을 드리면 1. 비판적 글쓰기를 위한 보편적인 방법론, 보편적인 공부 방법을 미리 규정하긴 어렵다고 봅니다. 가령 현재 제게 가장 유용한 이론적 배경이 되는 것은 위르겐 하버마스와 낸시 프레이저 등의 이론가이며 특히 낸시 프레이저가 자신의 메타이론적 배경으로 제시한 화용론적 담론 이론을 중요한 준거점으로 삼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다른 사람의 비판적 글쓰기에도 가장 좋은 방법일 거라 말하긴 어렵겠지요. 중요한 건 본인이 현실 세계의 어떤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그에 맞는 방법론을 궁리하고 그에 맞는 공부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직 젊으시다면 지금은 최대한 열어놓고 다양한 이론적 배경들을 접해보고 조금씩 본인이 참여하는 논의에 맞는 것들을 본인의 경험적 삶 안에서 구성하시라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글쓰기'로만 한정한다면 글쓰기는 허접하든 아니든 완결된 글을 쓰는 연습을 통해서만 숙련될 수 있습니다.
2. 제가 보기엔 이미 상당한 참여를 하고 계시지 않나 싶습니다. 직접적인 활동가, 운동가의 삶이 있고 그에 대한 시민들의 연대가 가능할 텐데 전자를 원하신다면 직접적으로 운동에 투신하셔야 하겠지만 후자라면 각자의 자리에서 가능한 만큼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연대하면 되겠지요. 자신의 사적인 경험적 세계에서 다툴 수도, 여러 채널을 활용한 공적 발언으로 다툴 수도, 때로 허용이 된다면 물리적인 집회에 참여할 수도, 만약 허용이 된다면 금전적 지원도 가능하겠지요. 물론 그 모든 게 충분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밑의 다른 답글에서도 이야기했듯 '전부 아니면 무'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3. 동시대 한국 필자 중에선 이라영 선생님과 정은정 선생님 글을 가장 좋아합니다. 이미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분들이지만(가령 한겨레21에서 논픽션 작가 21명을 선정했을 때 두 분이 포함되었죠) 그럼에도 아직 그 두 분에 대한 평가는 과소하지 않나 싶습니다.
@junghee 안녕하세요. 말씀주신 고민은 저 역시 예전부터 그리고 현재진행형으로 가지고 있는 고민입니다. 우선은 지금의 문제의식을 잃지 말라고 응원하고 싶고요, 다만 스스로 말씀하신 '완벽한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이상을 본인의 실천에 대한 비교대상으로 삼진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완벽한 페미니스트란 무엇일까요. 페미니스트로서의 실천이 정치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수많은 순간 다양한 적대와 연대의 맥락에서 여러 골치아픈 현실적 모순에 답하는 과정에서 또 같은 페미니스트 진영 내에서의 합의와 불화 사이에서 고정되지 않은 방식으로 실천될 것입니다. 중요한 건 완벽함 혹은 순수함이라는 미심쩍은 이상을 추구하기보다는 현실의 구체적 사안들에 쳔착한 고민과 실천, 그리고 그때 그때의 자기반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순간 저를 비롯한 남성 페미니스트의 실천이란 불완전하지만 그 불완전함을 인식하며 개선해나가는 것이 필요하지, 완전함을 근거로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한다면 '전부 아니면 무'가 되어버리겠지요.
남성 페미니스트 혹은 남성 연대자의 자리란 완벽한 페미니즘의 이상이 지정해주는 어떤 지점에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현재진행형의 정치적 실천에서 가장 필요하고 가장 효용이 있으며 가장 실천적 모순을 줄일 수 있는 자리를 계속해서 판단하고 또 유연하게 적응하는 것이라 봅니다. 물론 그것은 자기 혼자만의 판단이 아닌 동료 여성 시민들의 목소리가 담긴 공적 의사소통을 통해 운반되는 여러 논거와 요구를 고려한 것이어야겠지요.
하나 덧붙이자면 남성으로서 여성이 경험하는 부조리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대한 '어려움'을 항상 인식하되(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것을 '불가능함'으로 전제하진 않았으면 합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의 글을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고 있는 독자 중 한 명입니다 늘 일방향으로 소통하다가 답변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굉장히 반갑습니다 세 가지 정도 질문 드리고자 합니다
1. 아직 진로를 고민하고 있는 학생으로서, 작가님처럼 글로써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꼭 글을 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관련해서 공부를 해보고 싶습니다 작가님처럼 날카롭고 비판적인 글을 쓰기 위한 전문성을 기르려면 어떤 공부가 필요할지 궁금합니다
2. 지하철 노조 파업 등 사회 운동을 지지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이런 얘기를 해보려고 해도 관심있는 지인 몇 명과의 대화에서 그치고,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지하철 파업의 경우) 그냥 조금만 더 일찍 나오면 별로 불편하지 않다는 소극적인 반항을 담은 대답 정도가 제가 할 수 있는 전부로 느껴져 무력할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맞으면 집회에 종종 참여하고 있지만 이외에 노조 등 투쟁 단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혹시 생각해두신 부분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3. 번외의 느낌으로.. 작가님께서 개인적으로 좋아하시는 평론가 혹은 작가 분이 계시다면 추천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개인적으로 모 진보정당의 지역모임에 계속 참여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고 얘기를 나눌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미래인에서 나왔던 ‘여성학’이라는 책을 순서대로 읽으면서 관련된 내용을 얘기하는 방식 이었습니다
나름 많은것을 알게되고 얘기를 나눌수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이런것들을 모르고 살았던 날들이 많았다 보니 머리와 가슴으로는 이해를 하고 많은것들에 동의를 해도 남자로서 완벽한 페미니스트가 될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항상 다소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생겨나고 있는 이슈들과 아직도 이런저런 미디어에서 여성을 포함한 특정층에 대한 은근하거나 대놓고 하는 차별들을 보면서 화도 많이 났고 적절한 의견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그런것들을 태어날때부터 고스란히 당하고 살았던 여성분들에 비해서는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에 많은 베네핏을 받으며 살아왔고 그때문에 내가 알게되고 느끼게 되는것들에 과연 진정성이 있는가에 대해 항상 의문을 가지게 되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작가님께서 쓰신 책을 포함하여 많은 책들을 읽고 관련된 미디어물을 많이 보고 있고 많이 보려고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정말 남자로서 더 좋은 페미니스트가 되고자 한다면 무엇을 더 해야하고 어떤식으로 접근하면 좋은지 조언을 얻고 싶습니다
@유영진 안녕하세요.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그럼에도 부러 다시 댓글을 다는 건 저 역시 '내 눈 앞의 안경'에 대한 자기 인식에 대해선 유영진 님과 크게 다른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유영진 님께선 저와 '어떤 안경'이냐는 것에서 입장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듯하지만 저는 그보단 '안경 이전'의 관점이 가능한가에 대한 철학적 입장 차라고 생각합니다. 안경 자체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그 인식의 필요성은 오히려 서로 공유하는 바라고 봅니다.
@위근우 솔직히 제 기대보다 더 길게 답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답변하셨는지 이해했습니다만, (말씀 주신 내용들에서 예전에 제가 스치듯 읽었던 몇 권의 책들도 떠오릅니다) "문제를 알았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그 문제를 바라보는 내 눈 앞에 어떤 안경이 씌워져 있는지부터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체계적인 생각의 핵심이다" 라는 제 기존 입장에도 변함은 없습니다. 작가님은 "내 눈 앞에 놓인 안경은 내 주관적인 경험과 실천을 통해서 만들어진 나만의 것이다" 로 답변하신 것으로 보이고, 추후 대중과의 소통을 통해서 좀 더 상호주관적인 안경을 만들어 가실 것으로 예상하시는 것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제가 고개를 끄덕일 만한 답변이며,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김재경 안녕하세요. 사실 '그냥' 쓰는 위근우라는 건 얼룩소 편집팀에서 달아주신 타이틀이라 ㅋㅋㅋ
그럼에도 마감노동자로서 17년, 비정규 마감노동자로 최근 6년을 버틴 경험을 근거로 말씀드리자면 첫째 글을 써서 먹고 사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지속가능성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애매하게 유명한 필자의 커리어라는 것은 꾸준히 쌓인다기보다는 아직 안 잘려서 유지 중이란 뜻일 뿐입니다. 둘째 당장 얀 잘리고 유지 중인 커리어도 글쓰기 만으론 생활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글쓰기로 얻는 한줌의 상징권력으로 강연이나, 방송출연, 책 팔이 등의 부수적 수입을 올려야 합니다. 저는 유튜브나 팟캐스트, 메일링 서비스 같은 1인매체적 수입 모델은 시도해본 적이 없지만 때에 따라 그런 것도 가능하겠지요.
이렇게만 말하면 암울하기만 한데(그런데 그게 진실에 가깝긴 하고요) 꾸준한 글쓰기와 담론장에의 참여라는 건 상어의 꼬리 걑은 것입니다. 계속 움직여야 익사하지 않는 거죠. 당장 돈이 되지 않는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예매체에서 제 인스타나 트위터 인용할 때 10원 한 푼 주지 않지만 어쨌든 계속 부단히 움직여야 새로운 기회라는 게 발견될 수 있습니다. 기회를 '발명'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제 경험을 넘어서는 사례일 것 같네요.
@유영진 안녕하세요. 긴 질문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오해하지 않았다면 올려주신 세 가지 질문은 결국 엄정성에 대한 질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에 대한 제 답변은 아마 어떤 의미로든 만족스럽지 않으실 텐데, 첫째 질문에 대한 답이라기보다는 질문에 깔린 가정에 대한 입장차를 드러내는 답이 될 것이며 둘째 어쩌면 질문에 깔린 가정을 제가 오해하고 답변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서로의 차이(정치적 관점의 차이가 아닌)를 선명히 할 때 토픽도 선명해지리라 생각하고요, 단지 제가 질문에 대해 오해에 기반한 답을 하는 게 아니길 조심스럽게 바랄 뿐입니다.
세 가지 질문을 주셨지만 결국 그것들은 '체계적인 선택'이라는 질문으로 환원된다고 보는데요, 제 입장은 그 질문은 옳으나 체계적인 선택이냐 아니냐는 건 논의 혹은 논쟁 과정 이전에 선취될 수 없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제가 오해한 게 아니라면 유영진 님이 말하는 '체계적인 선택'은 객관적인 정당성에 대한 질문이라 보는데요, 저는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인식의 고정점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비판적 담론의 과포화에 대한 우려와 그 대신 대상에 대한 '설명'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유영진 님의 접근에 대해선 존중하고 또한 그것이 실제 논의에 기여할 것이라는 것은 믿어의심치 않지만, 객관적 설명과 비판적 실천을 이분하는 것에 대해선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저는 객관적 인식의 지점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인식주체는 결국 자신이 속한 해석적 지평 위에서 세계를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입니다. 유영진 님께서 해석학에서 말하는 초월적 관점을 요구하는 건 아니겠지만 저로선 일종의 유사초월적 관점이 전제되는 것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하버마스가 <인식과 관심>에서 말한 바, 저는 주체가 객체를 이론적으로 전유하는 '인식'은 해석학적 주체들이 자신의 생활세계 내에서의 주관적 경험과 실천의 맥락에서 형성하는 것이라 봅니다. 즉 실천이 인식에 선행한다고 봅니다.
제 개인적 경험을 예시하자면 말씀해주신 나무위키와 관련한 논쟁에서 저는 2016년 클로저스 사태에서 여성혐오 맥락을 지우고 여러 비판적 발언을 한 이들에 대한 목록을 생성하던 일부 나무위키 유저들과의 상징 투쟁, 나무위키의 '위근우 논란/비판' 항목을 보고 제게 '그래서 박진성 시인에겐 사과하셨나요?'라고 물으면 제가 버로우 탈 거라 믿던 사람들의 불링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제 인식과 방법론은 그러한 구체적 논쟁과 실천의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며 객관적 혹은 유영진 님의 표현을 빌리면 체계적인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또한 유영진 님께서 말씀하신 '어떤 사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론적 다양성이 적다고 느낄 때 글을 쓰고자' 하는 행위 역시 저에겐 생활세계적 실천의 맥락에서 인식이 형성되는 것에 가깝다고 봅니다.
물론 이것이 자신의 해석학적 지평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개인들 간의 합의 불가능한 주관주의의 무간지옥을 긍정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그런 해석학적 한계를 지는 주체들 간의 발화가 상호주관적이고 합의지향적인 의사소통행위를 통해 조절되고 비로소 비교적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수준의 관점 혹은 지식이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더 객관적이거나 체계적 접근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시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옳으나, 그것은 미리 선취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관점과 논거의 교류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답변은 질문을 많이 비껴가는데요, 저는 전체 논의를 조망할 수 있는 공평무사한 객관적 인식의 고정점을 아예 제 글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으며, 오히려 양심적인 글쓰기란 자신의 해석적 지평과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이 어떤 실천적 관심에서 형성되는지 솔직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글에서 저의 입장을 마치 선험적이거나 객관적인 것처럼 자연화했다면 그것은 제가 잘못한 게 맞을 것입니다. 다만 안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Sospcoco 솔직히 많이 매우 매우 아쉽습니다. 가령 최근 자신을 남성연대라 주장하는 한 남성이 숏컷한 여성을 페미니스트라며 구타한 사건이 있었는데요, 이 정도 사건이 있을 때 대중적인 영향력과 명망 있는 남성 필자들(떠올릴 수 있는 여러 이름이 있겠죠)이 이것은 여성혐오범죄이며 실제 그 남성이 남성연대 회원이냐 아니냐와 별개로 페미니스트 혐오를 퍼뜨리던 신남성연대 및 배인규 따까리들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이름을 걸고 발화한다면 유의미한 사회적 압박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최소한 우리 사회는 그런 혐오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가상적 마지노선을 그을 수는 있겠죠. 제가 그런 얘기를 해봤자 그냥 '위근우가 또?'에 불과합니다. 물론 제가 그들보다 더 용기 있고 양심적이라서가 아니라 그들보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이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긴 합니다만 평소 차별과 혐오는 잘못됐다는 원론적인 맞는 말을 하다가 구체적 이슈에선 침묵하는 분들을 보면 많이 아쉽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땐 지금보다 더 유명하고 명망 있는 작가가 되고 싶기도 합니다.
@위근우 답변 감사합니다.
하나 또 질문해도 될까요?
대한민국에는 유독 자기 주장이 세거나 분명하면 특이한 시선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다들 자기 입장이 있고 여러 관계가 있는 걸 이해하지만서도. 논쟁적인 이슈에 관해서 발언을 지나치게 주저하는 작가들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여기서 방점은 /지나치게/요. 물론 발언했다가 상처를 받은 경우가 있다고 하지만서도. 너무 안전한 발언만 하는 작가들을 볼 때 독자들은 조금 ?? 할 때가 있거든요. 책에서는 그렇게 말하자고 해놓고 삶은 전혀 다른 작가들을 볼 때마다 뜨아.. 합니다.
@ocean0220 안녕하세요. 짊문주신 분께서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명확하고 단호한 입장을 독선과 독단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경우가 실제로 많긴 하지만, 제 경우 명확한 입장을 견지하고 발언하는 건 제가 옳다고 절대적으로 확신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틀릴 수 있고 틀렸다면 왜 틀렸는지 명확해지기 위해서 명확한 입장을 취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 비평을 한다는 것은 결코 대상에 대한 최종심급이 아닙니다. 판사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공론장 안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판사의 역할이 아닌 검사나 변호사의 역할로 논쟁에 뛰어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논의에서 제 변론이 틀린 것으로 밝혀지고 상대가 승소할 수도 있겠지요. 다만 그 재판 과정의 논리가 서로 첨예할수록 사안의 구체적 맥락은 더 잘 드러나고 배심원들이 옳고 그름을 판별할 좋은 근거들도 더 가시화될 거라 믿습니다. 물론 제가 옳다면 좋겠지만 혹 틀리더라도 그 틀림을 구성하는 논리와 관점, 경험적 근거들이 뚜렷하게 제시되어야 그 틀림을 비판하고 더 나은 결론으로 지양하는 게 가능할 것입니다. 반면 두루뭉술한 언어나 구체적 지시체 없는 원론적이고 안전한 말들로는 유의미한 논의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봅니다.
제가 오늘 3시부터 낮술 약속이라 오늘 더는 답변이 어렵고 내일부터 맑은 정신으로 답글 달겠습니다
@Sospcoco 솔직히 많이 매우 매우 아쉽습니다. 가령 최근 자신을 남성연대라 주장하는 한 남성이 숏컷한 여성을 페미니스트라며 구타한 사건이 있었는데요, 이 정도 사건이 있을 때 대중적인 영향력과 명망 있는 남성 필자들(떠올릴 수 있는 여러 이름이 있겠죠)이 이것은 여성혐오범죄이며 실제 그 남성이 남성연대 회원이냐 아니냐와 별개로 페미니스트 혐오를 퍼뜨리던 신남성연대 및 배인규 따까리들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이름을 걸고 발화한다면 유의미한 사회적 압박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최소한 우리 사회는 그런 혐오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가상적 마지노선을 그을 수는 있겠죠. 제가 그런 얘기를 해봤자 그냥 '위근우가 또?'에 불과합니다. 물론 제가 그들보다 더 용기 있고 양심적이라서가 아니라 그들보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이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긴 합니다만 평소 차별과 혐오는 잘못됐다는 원론적인 맞는 말을 하다가 구체적 이슈에선 침묵하는 분들을 보면 많이 아쉽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땐 지금보다 더 유명하고 명망 있는 작가가 되고 싶기도 합니다.
@오혜민 안녕하세요. 남성으로서 어쩌다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을 갖고 발언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은 굉장히 자주 받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항상 스스로도 '나한테 어떤 계기가 있었지?'라고 질문해보기도 합니다. 굳이 개인사적으로 따져보자면 부모님 두 분 다 호남 출신이셔서 비교적 어릴 때부터 지역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던 면이 있습니다. 중학교 때쯤 김대중(당시 정계 은퇴)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에서 지역감정이란 개념은 기만적이고 지역차별이 본질이라는 구절을 읽고 상당히 큰 울림을 받았는데 사실 현재의 젠더갈등이란 개념이 정확히 여기에 대응하지요. 또 다른 개인사적 계기는 현재의 배우자를 비롯해 여성 동료들과 함께 일하며 그들에 대한 존중과 관점의 공유를 통해 여성이 느끼는 차별과 두려움을 비교적 거부감(?) 없이 인식 및 동의하게 된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이런 개인사적인 계기로 서사화해 설명하기보다는 그냥 제가 상식적인 사람이라 그렇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뭐랄까 왜 어쩌다 페미니스트가 되었느냐라는 질문에 답하다 보면 외려 수세적 입장이 되는 것 같거든요. 그보단 이건 그냥 상식적 선택이고 페미니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여성혐오에 동조하는 비상식인이라고 더 공세적으로 설명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관심있는 주제는 심의민주주의 모델에서 공론장의 역할입니다. 대중문화비평을 할 때도 문예 공론장과 정치 공론장의 접합을 생각하며 쓰는 편이고요.
@Sospcoco 안녕하세요. 순서대로 답을 드리면 1. 용기보단 참을성 없음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에게 글을 쓰는데 있어 더 필요한 건 용기보단 어떤 종류의 의연함이었는데요 이에 대해선 곧 나올 제 글쓰기 에세이책을 보시면 더 잘 알 수 있을 듯합니다(찡긋). 2. 글을 쓰며 화딱지가 난다기보다는 언제나 화딱지가 나는 게 글쓰기의 시작점인 것 같습니다. 이것도 곧 나놀 책을 보면... 그거랑 별도로 상대의 논리가 퇴화해 반박의 논리도 퇴화할 때 좀 빡이 칩니다. 가령 2016년 클로저스 사태 땐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닌 왜곡된 페미니즘에 반대한다'는 말이 왜 틀렸는지 논박했다면 요즘엔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라는 말에 반박해야 하니 논의 자체가 퇴행하는 느낌이 들어 화나고 자괴감 듭니다. 3. 안티가 생긴다고 잘 쓰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지만 잘 쓰고 있다면 안티가 생기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안티가 생기지 않는다는 건 현실의 구체적 지시체를 피하고 굉장히 원론적인 얘기만 하고 있다는 반증이라 생각해요. 4. 적죠. 수 년도 아니고 수십 년 동결에 가까우니까요. 물론 조선일보나 중앙일보 같은 돈 많은 보수 신문사라면 다르지 않을까 싶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쓰고 싶진 않고요(물론 제안도 없습니다). 좀 정확히 말해 진보 일간지의 고료 문제라 할 수 있을 텐데 이게 더 올리는 게 맞지만 그쪽 사정을 생각하면 좀 안쓰럽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5. 당연히 먹고 사는 것의 어려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양심을 지키며 먹고 사는 것의 어랴움으로 소급하지요.
@송시무스 안녕하세요. 그 질문을 주실 정도면 상황의 맥락을 어느 정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다른 독자들을 위해 부연하면 장도님께서 안티페미니스트 여성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흉자'라는 표현을 썼고 저는 평소 그의 활동 전반에 호의가 있지만 그 표현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밝힌 게 교류?의 시작(이지만 그 이후론 뭐가 없네요)이었습니다. 장도님은 그럼에도 저에 대한 존경의 표현을 했고 저는 저대로 해당 이슈와 별개로 다른 건에선 연대가 가능한 동지라 생각하고 평소 활동에 대한 응원을 남겼고요. 이후 장도님이 '트페미'와 싸운 건(사실 이 건은 '트페미'라는 호칭의 문제도 있는데)은 왜 그랬는지는 알 것 같지만 분명히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모든 건에 제가 일일이 입장을 밝힐 정도의 관계는 아니었다 생각하고요. 만약 장도님이 제게 조언을 구했다면 드리고 싶은 말은 있다, 정도로 갈음할 수 있겠네요
안녕하세요, 오랜 트위터 팔로워인데 얼룩소에서 뵙게 되니 특히 더 반갑습니다! 몇 년 전부터 웹툰을 잘 안 챙겨보고 있었는데 추천해주신 덕분에 <위아더좀비> 같은 훌륭한 작품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ㅎㅎ
저도 기아 팬이라 야구 트윗 하실 때마다 혼자 내적친밀감을 높여왔는데, 아직 스토브리그 초반이지만 다음 시즌 어떻게 기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혹시 얼룩소에 주간 타이거즈 리뷰 같은 거 올려보실 생각은 없으실까요...? 😂
@유영진 안녕하세요.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그럼에도 부러 다시 댓글을 다는 건 저 역시 '내 눈 앞의 안경'에 대한 자기 인식에 대해선 유영진 님과 크게 다른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유영진 님께선 저와 '어떤 안경'이냐는 것에서 입장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듯하지만 저는 그보단 '안경 이전'의 관점이 가능한가에 대한 철학적 입장 차라고 생각합니다. 안경 자체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그 인식의 필요성은 오히려 서로 공유하는 바라고 봅니다.
@김재경 안녕하세요. 사실 '그냥' 쓰는 위근우라는 건 얼룩소 편집팀에서 달아주신 타이틀이라 ㅋㅋㅋ
그럼에도 마감노동자로서 17년, 비정규 마감노동자로 최근 6년을 버틴 경험을 근거로 말씀드리자면 첫째 글을 써서 먹고 사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지속가능성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애매하게 유명한 필자의 커리어라는 것은 꾸준히 쌓인다기보다는 아직 안 잘려서 유지 중이란 뜻일 뿐입니다. 둘째 당장 얀 잘리고 유지 중인 커리어도 글쓰기 만으론 생활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글쓰기로 얻는 한줌의 상징권력으로 강연이나, 방송출연, 책 팔이 등의 부수적 수입을 올려야 합니다. 저는 유튜브나 팟캐스트, 메일링 서비스 같은 1인매체적 수입 모델은 시도해본 적이 없지만 때에 따라 그런 것도 가능하겠지요.
이렇게만 말하면 암울하기만 한데(그런데 그게 진실에 가깝긴 하고요) 꾸준한 글쓰기와 담론장에의 참여라는 건 상어의 꼬리 걑은 것입니다. 계속 움직여야 익사하지 않는 거죠. 당장 돈이 되지 않는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예매체에서 제 인스타나 트위터 인용할 때 10원 한 푼 주지 않지만 어쨌든 계속 부단히 움직여야 새로운 기회라는 게 발견될 수 있습니다. 기회를 '발명'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제 경험을 넘어서는 사례일 것 같네요.
@gongbaek 안녕하세요. 질문주신 것에 대해 답을 드리면 1. 비판적 글쓰기를 위한 보편적인 방법론, 보편적인 공부 방법을 미리 규정하긴 어렵다고 봅니다. 가령 현재 제게 가장 유용한 이론적 배경이 되는 것은 위르겐 하버마스와 낸시 프레이저 등의 이론가이며 특히 낸시 프레이저가 자신의 메타이론적 배경으로 제시한 화용론적 담론 이론을 중요한 준거점으로 삼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다른 사람의 비판적 글쓰기에도 가장 좋은 방법일 거라 말하긴 어렵겠지요. 중요한 건 본인이 현실 세계의 어떤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그에 맞는 방법론을 궁리하고 그에 맞는 공부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직 젊으시다면 지금은 최대한 열어놓고 다양한 이론적 배경들을 접해보고 조금씩 본인이 참여하는 논의에 맞는 것들을 본인의 경험적 삶 안에서 구성하시라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글쓰기'로만 한정한다면 글쓰기는 허접하든 아니든 완결된 글을 쓰는 연습을 통해서만 숙련될 수 있습니다.
2. 제가 보기엔 이미 상당한 참여를 하고 계시지 않나 싶습니다. 직접적인 활동가, 운동가의 삶이 있고 그에 대한 시민들의 연대가 가능할 텐데 전자를 원하신다면 직접적으로 운동에 투신하셔야 하겠지만 후자라면 각자의 자리에서 가능한 만큼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연대하면 되겠지요. 자신의 사적인 경험적 세계에서 다툴 수도, 여러 채널을 활용한 공적 발언으로 다툴 수도, 때로 허용이 된다면 물리적인 집회에 참여할 수도, 만약 허용이 된다면 금전적 지원도 가능하겠지요. 물론 그 모든 게 충분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밑의 다른 답글에서도 이야기했듯 '전부 아니면 무'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3. 동시대 한국 필자 중에선 이라영 선생님과 정은정 선생님 글을 가장 좋아합니다. 이미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분들이지만(가령 한겨레21에서 논픽션 작가 21명을 선정했을 때 두 분이 포함되었죠) 그럼에도 아직 그 두 분에 대한 평가는 과소하지 않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