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혁현 · 오래된 활자 중독자...
2024/06/09
대학교 일학년 때 수다와 침묵 사이의 택일, 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제목만 있고 본문은 없는 시였다. 황지우와 장정일을 넘어 박남철을 탐독하던 시기였다. 선배들에게 크게 욕을 먹었다. 대학로의 씨앙씨에에서 미클로사 얀초 감독의 <붉은 시편>을 보고, 비디오 테이프로 피에르 파올로 파졸로니 감독의 <살로 소돔의 120일>과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 태엽 오렌지>를 보았다. 동생이 영화과에 진학했다.
“일반적으로 다음 네 가지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나와 맞지 않는다. 애국심, 애향심, 애교심, 애사심. 그래서인지 대구 출신인 나는 대구에 사는 게 힘들었고(대구는 애향심의 도시다, 특히 수성구 사람들의 지역에 대한 자부심은 인류학적 연구 대상이다) 대학교를 다니는 게 힘들었으며(과 잠바는 지구의 오물이다) 회사 간부들과 의견이 맞지 않았고(회사가 잘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람) 한국에서 사는 게 힘들다...” (p.59)
정지돈의 《영화와 시》를 읽으면서 이 책은, 내가 만약 멈추지 않고 계속 시를 썼다면, 동생이 아니라 내가 영화과에 진학을 했다면, 그리고 시간이 흘러 어느 나이쯤의 내가 도착했을 수도 있는 지점이 아니었을까, 하고 잠시 상상했다. 책에 등장하는 ‘삶이 그렇듯 무엇도 필연적이지 않다. 동시에 이미 이루어진 것은 그 무엇도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라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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