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 대한극장
2024/05/01
전쟁이 끝난 뒤의 한국에서 헐리웃 영화는 거의 절대적인 존재였다. 물론 한국 영화도 60년대의 전성기를 준비하고는 있었지만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의 가슴을 녹여 주고 가난과 피로를 잊게 해 주었던 것은 홍수처럼 밀려들었던 헐리웃 영화들이었던 것이다. 영화 <애수>를 보면서 전쟁으로 찢어진 연인들의 슬픈 운명에 자신들을 대입시켰고 뒤돌아서 떠나는 총잡이의 뒤에서 “세인! 컴 백!”을 부르짖는 꼬마를 보면서 아련한 감상에 젖었다. 이런 수요를 위하여 뭔가 쌈박한 극장이 필요하다고 여긴 사람들이 있었다. 서울 시장을 지냈던 김형민과 아들을 한국전쟁에서 잃었던 밴플리트 전 (前) 미 8군 사령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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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장이었던 김형민은 서울 시민들의 문화 휴식 공간을 위해 극장을 세우고자 했고 밴플리트 중장은 미국의 20세기 폭스를 연결시켜 주었다. 그 결과 당시로서는 최첨단 공기 정화 시설을 가동시켰기에 창문이 하나도 없는, 당시로서는 이색적인 건물이었던 대한극장이 1958년 4월 탄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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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좌석 시스템까지도 미국에서 직수입했고 2천석의 웅대한 규모를 자랑했던 대한극장은 개관 몇 년 후 70mm 대형 화면을 갖춘 국내 유수의 극장으로 발돋움한다. 그런데 정작 밴플리트 중장은 “대한극장에 10만 달러 융자를 주선해 주었는데 그 빚을 갚지 않는 바람에 보증인을 선 자신한테 빚 독촉이 왔다.”며 하소연을 한 일도 있었다니 (김운용 전 IOC 위원장 증언) 내막은 좀 더 복잡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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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극장이 서고 한창 잘나갈 무렵은 한창 헐리웃에서 대작 영화 붐이 불 즈음과 맞물리고 있었다. 대한극장의 70밀리 ‘시네마 스코우프...
사학과는 나왔지만 역사 공부 깊이는 안한 하지만 역사 이야기 좋아하고 어줍잖은 글 쓰기 좋아하는 50대 직장인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와,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명화들의 제목이 추억에 빠져들게 하는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