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녀와 호걸」, 다케다 다이준

Orca
Orca · 제국에 관한 글쓰기
2024/03/25
음녀와 호걸 
음녀와 호걸은 중세의 현실을 응축한 상징 같은 느낌이 있다. 상징이기 때문에 음녀도 호걸도 각각 그 중세적 결정체, 그 자신의 원자가를 지니고 있다. 이를 현대풍 분위기에서 뿔뿔이 풀어헤쳐놓으면 작용은 상실되고 이질적인 무언가가 될 염려가 있다. 우리들은 이미 반금련이나 무송을 우리 가정에서 발견할 수 없다. 우리의 일상 사상 속에 그들은 없다. 머나먼 상징으로서 살아있을 뿐이다. 그렇건만 음녀가 음탕한 짓을 하고 호걸이 사람을 죽이는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여간 재밌는 것이 아니다. 이건 곤란한 습관이다. 
그 재미는 음탕한 짓을 하는 이유, 죽이는 원인은 차치하더라도 淫 그 자체, 殺 그 자체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근대문학의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극히 동물적 사실의 매혹이다. 간음 장면, 살인 광경만이더라도 근사하게 작품 속에 자신들의 위치를 점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흥분을 불러일으키고 기억에 남고, 방약무인한 자기주장을 하는 것이다. 
먼저 이 양자에는 범인은 미치기 어려운 철저한 성격 행동이 있다. 그것이 외물에 의해 동요될 수 없는 절대성을 띠고 있다. 강렬한 욕망의 색채, 애매한 일상생활의 회색빛 벽에 기탄없이 에마키(두루마리 그림)를 그린다. 그 제멋대로의 회화는 음녀호걸파에 속한다. 
음녀와 호걸은 서로 흡인하는 경향이 있고 야성의 세계에서 얼굴을 마주하기 쉽다. 그것도 평온한 해후는 아니다. 淫은 殺을 부르고 殺은 淫을 구한다. 결국은 호걸이 음녀를 죽인다. 정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된다.  
<수호전> 중 그 예를 찾아보면 무송이 형수를 죽이는 대목, 송강이 염파석을 죽이는 대목, 석수가 반교운을 죽이는 대목이 있다. 
걸작은 물론 반금련이 남편을 죽이고 그 원수를 무송이 갚는 이 대목이다. 
형의 원수를 동생이 갚는다. 이 도의가 재밌는 것은 아니다. 여자로서의 금련, 남자로서의 무송이 상징적이라는 것. 이것이 발군인 것이다. "태산에 오르지 않고 천하의 높음은 알 수 없다. 태산에 올라도 일관에 오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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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6년, 방공통제사 3년, 석사 생활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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