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균
유한균 인증된 계정 · 출근시간에 우린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
2024/01/01
1. 무명용사의 묘에 서서

ΜΙΑ ΚΛΙΝΗ ΚΕΝΗ ΦΕΡΕΤΑΙ ΕΣΤΡΩΜΕΝΗ ΤΩΝ ΑΦΑΝΩΝ
찾을 수 없는 자들을 위한 빈 상여가 있다.
ΑΝΔΡΩΝ ΕΠΙΦΑΝΩΝ ΠΑΣΑ ΓΗ ΤΑΦΟΣ
온 세상이 영웅들의 무덤이다.
   
그리스 무명용사의 묘에 쓰여있는 문구들이다. 투키디데스가 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따온 구절들이라 한다. 그 옆으로 작은 글씨로 오늘날의 그리스 군인이 전사한 모든 전장을 써놓았다. 오른쪽 한구석에 쓰여있는 지명이 눈에 띈다. <ΚΟΡΕΑ>. 한국이다. 그리스는 6.25 전쟁에 1개 대대와 수송 편대를 파병한 역사가 있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은 그 무명용사의 묘 옆이었다. 그 위치가 어쩌면 당연했다. 헌법이 반포되어 그 이름을 딴 신타그마(Συντάγμα) 광장이 가까웠다. 광장에서 서면 지금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옛 왕궁과 무명용사의 묘가 한눈에 보였다. 주변도 주요 관공서가 모여있는 장소이자 관광객이 몰려드는 번화가다.
 
무명용사의 묘에는 한 시간마다 근위병 교대식이 이루어졌다. 우리도 시간이 맞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군인들은 우리나라로 치면 대통령 경호부대 소속이다. 독립전쟁 당시 정예병이었던 에브조네스(ΕύζΩνες) 복장을 예복으로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제법 군기가 엄정했다.
그리스 무명 용사의 묘와 근위병 @ 촬영
교대식을 구경하면서 사실 내가 머릿속에 떠올렸던 것은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란 책이었다. 물론 적절하지 않긴 했다. 다른 나라의 국가적 의례를 보며 떠올린 게 민족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명저라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책의 시작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근대 내셔널리즘 문화의 상징으로 무명용사의 기념비나 무덤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없다. 일부러 비워 놓았거나 누가 그 안에 누워 있는지 모른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무명용사의 기념비와 무덤에 공식적으로 의례적 경의를 표한다는 것은 일찍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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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웠던 공부들이 어느새 거짓말처럼 향 연기마냥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이가 들어도, 그 시절 고민했던 내가 남아있게 글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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