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 정신사로서의 「마음こころ」
2024/03/25
패자의 정신사로서의 <마음>
<마음>은 패자의 정신을 비춘다. 1955년의 영화가 그렇다는 것이다.
먼저, 내가 말하는 '패자의 정신사'가 야마구치 마사오가 쓴 동명의 명저가 지닌 시각과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해두자. 야마구치가 말하는 패자는 메이지 시대에 살아남은 도쿠가와 막부의 관료 출신들이다. 야마구치가 묘사하는 그들의 정신은 '취미'가 그 근간에 있다. 다르게 말하면 아소비, 유희로서의 정신이다. 자신들이 섬기던 도쿠가와 가문이 권력을 빼앗기고, 더 나아가 자신들이 믿던 에도의 세계관이 산산이 부서진 것에 대해 그들은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가? 야마구치는 이 점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등장인물들은 마음에 맺힌 곳이 하나 없는 사람들처럼 유희와 취미와 아소비에 시종한다. 그것은 그것대로 박학다식, 실사구시의 열매를 맺는다. 결론으로 야마구치는 두 가지를 지적한다. 하나는 전후 일본이 '패자의 정신사'를 배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패자의 정신사'에 쇼와 일본이 주목했다면 역사가 훨씬 나았을 거라고 한다. 나는 오히려 여기서 전후세대 30년대생 학자의 전중파에 대한 대결의식이 보이는 것 같다. 또 그가 '패자의 정신사'를 지나치게 산뜻하고 맺힌 곳 없이 재현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일별했을 때 내가 받은 느낌은, 장자적인 소요의 경지와 일본의 전통적인 모노노아와레의 심정과 서구의 과학실증주의가 적절히 배합되어 있다는 것이었다[1].
내가 보고자 하는 '패자의 정신'은 무엇인가?
"주민들이 시체를 방에서 끌어내자마자 레베까는 집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세상의 그 어떤 유혹도 깨뜨릴 수 없는 두꺼운 절망의 껍질에 둘러싸여, 산 채로 집 안에 파묻혀버렸다. <방황하는 유태인>이 마을을 지나가면서 숨막히는 더위를 몰고와 새들이 방 안에서 죽기 위해 창문 철망을 뚫었던 당시, 이미 아주 늙어버린 레베까가 언젠가 녹슨 은빛 신발을 신고, 작은 꽃으로 엮은 모자를 쓰고 길거리로 나왔다. 누군가 레베까가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