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M)도 여자(F)도 아닌 사람입니다만(X), 비자 신청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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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부는 이제 성별에 남성(M)이나 여성(F)이 아닌 '논바이너리(X)'를 표기한 여권을 발급한다

논바이너리Non-binary란 문자 그대로, 양쪽 중 어느 하나에 속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성별의 맥락에서는 남성이나 여성 어느 한쪽으로 정체화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여권 상 성별에 M, F 말고도 다른 표기를 할 수 있다니 놀란 분도 계실 테지만, 국제 민간 항공 기구(International Civil Aviation Organization; 이하 ICAO)는 여권의 표준 규격 및 요건을 명시한 문서에서 "여권에는 소지인의 성별이 표기되어야 하며" "여성을 뜻하는 F, 남성을 뜻하는 M, 특정되지 않은 성별을 뜻하는 X"로 표기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쯤에서 슬슬 오지랖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성별이 X로 표기된 여권을 소지하고 여행이든 출장이든, 제대로 다닐 수 있을까? 비자를 신청할 때 성별 선택지가 남성과 여성밖에 없으면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게 되는 것 아닐까. 둘 중 하나의 성별을 선택해서 어떻게든 비자를 발급받더라도 출입국 수속 시 비자 정보와 여권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다며 어딘가로 끌려가는 것 아닐까. 이런 절대 사소하지 않은 우려.

그러다가 까마득한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 2016년, 인도 여행을 목적으로 비자를 발급받아야 했다. 온라인 비자신청 페이지에서 비자 양식을 기입하는데, Gender 항목의 선택지로 '남성,' '여성' 외에도 '트랜스젠더'가 있었다.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인도 비자 신청 화면의 성별 선택지
그래 이거다. 비자 신청 양식에부터 남/여가 아닌 '논바이너리' 성별 선택지가 있으면 위와 같은 오지랖, 아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테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만약 이런 나라가 인도 뿐만이 아니라면, 또 어떤 나라가 비자 양식의 성별 항목에 '논바이너리' 선택지를 제공하고 있을까? 그리고 어떤 단어를 사용하여 이를 표기할까?

 비자(Visa; 사증) 신청서는 자국민이 아닌 사람들이 해당 국가에 체류 신청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접하는 서류이다. 비자 신청 양식을 통해 해당 국가가 사람에 대해 알고자 할 때(정보를 수집할 때) 주요하게 여기는 항목이 무엇이며(예를 들면 非한국인이 작성하는 대한민국 체류 비자 신청서에는 한자이름 란이 있다) 어떠한 기준으로 수집하는지를 알 수 있다. 만약 인간을 파악할 때 사용하는 틀의 모양새가 국가마다 다르다면 사람과 삶의 형태에 대한 상상력의 두께도 국가마다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몇몇 국가의 비자 신청 양식에 표기된 '논바이너리 성별' 선택지의 다양한 표현방식을 살펴본다.


비자 양식을 수집하기 위한 기준은 다음과 같다.
우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2021년 10월 기준 총 38개국)을 선정하였다. 그런데 OECD 회원국을 살펴보니 (유구한 식민지배와 수탈의 역사 때문인지)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한 국가가 하나도 없다. 따라서 대륙 별로(아프리카, 아시아, 유라시아, 유럽, 북미, 남미, 오세아니아) 국가를 구분하고 각 대륙에서 인구 수 기준 TOP3 국가를 추출하였다. [OECD 회원국]과 [대륙 별 인구 수 기준 TOP3 국가]에 중복된 항목이 있더라도 추가로 추출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각국의 온라인 비자 신청 사이트에서 Tourist Visa 혹은 Short-stay Visa를 확인하였다. 비자 신청을 온라인으로 진행할 수 없는 경우 대사관/영사관 홈페이지 또는 각국 외교/외무/이민 관련 정부부처 홈페이지에서 비자 신청 양식을 내려받았다.

확인 결과, 앞서 소개한 인도 외에도 칠레, 독일,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의 비자 양식에서 '논바이너리' 선택지를 발견하였다. (혹시 에디터가 발견하지 못한 나라가 있다면 부디 alookso의 주거니받거니 기능(aka 답글)을 활용하시어 널리 알려주시면 무척 감사하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중 흥미로웠던 일부 국가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인도
인도 비자 신청 화면

가장 먼저, 2016년의 나에게 짜릿한 충격을 주었던 인도의 비자 신청 화면이다. Gender의 선택지 중 하나로 TRANSGENDER가 있다. 그렇다면 '트랜스젠더'란 누구일까?

솔직히 고백한다. 나는 이걸 보고 히즈라*를 떠올렸다. 즉, 해당 지역에 오래 전부터 존재해 온 집단에 국한하여 법적 지위를 부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2014년 인도 대법원이 트랜스젠더를 '논바이너리 성별'로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을 때, 이 판결은 명백히 근대의 개념인 인권, 기본권에 기초하였다(관련 기사: Supreme Court recognizes transgender as 'third gender', THE TIMES OF INDIA, 2014.04.15).
*인도, 파키스탄을 비롯한 인도 아대륙에 오래 전부터 존재해온 '논바이너리' 집단

인도 대법원은 2014년 4월 판결을 통해 트랜스젠더의 민/형사법적 지위 인정, 교육과 고용에서의 차별 금지, 의료/공중보건/위생에 대한 접근성 보장을 주문하였다. 이후 '누가 트랜스젠더인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2016년 법안은 트랜스젠더라는 확인증을 받으려면 의사 등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검사를 통과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그러나 2019년에 제정된 법은 그러한 조항을 삭제하였다. 또한 2016년 법안과 달리 2014년 법안2019년 법률은 인도 및 주변 지역에 존재하는 사회문화적 정체성들 — kinner, hijra, aravani and jogta — 를 포함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제정된 2019년 법률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간성인'도 트랜스젠더의 정의에 포함하며, 젠더의 구성을 신체적 차원을 넘어(성전환 수술이나 호르몬 치료를 받았는지의 여부와 관련없이!) 사회적 문화적 차원으로 확장한다. 이런 과정을 보면 (트랜스)젠더 개념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k) "transgender person" means a person whose gender does not match with the gender assigned to that person at birth and includes trans-man or trans-woman (whether or not such person has undergone Sex Reassignment Surgery or hormone therapy or laser therapy or such other therapy), person with intersex variations, genderqueer and person having such socio-cultural identities as kinner, hijra, aravani and jogta. 


뉴질랜드
뉴질랜드 비자 신청 화면

뉴질랜드 정부는 비자 신청서 성별 항목의 논바이너리 선택지로 Gender Diverse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가 낯설어 찾아보다가, 뉴질랜드 정부의 문화유산부(Ministry for Culture and Heritage)가 만든 뉴질랜드 백과사전 Te Ara에서 관련 내용을 발견하였다.

"다양한 젠더의(Gender-diverse) 사람들이 자신 및 동류의 사람들을 정의하는 단어는 유동적이고 시간에 따라 지속 변한다. 일부는 뉴질랜드와 태평양 지역에서만 통용되거나, 뉴질랜드에서는 다른 곳에서와 다르게 이해되는 단어일 수도 있다. 해당 집단의 나이 많은 구성원이 사용하는 단어를 젊은 구성원은 불편하게 느낄 수 있다. takatāpui, rainbow 및 LGBTIQ+와 같이 포괄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다양한 성별과 섹슈얼리티를 가진 사람들을 포함하려는 시도이지만, 모든 사람이 이러한 용어에 포함된다고 느끼는 것은 아니다"
젠더가 사회적/문화적으로 구성되고,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수행에 의해 재현되는 무언가라면 남성이나 여성이 되는 절대적이고 명시적이며 불변하는 기준이 없다. 그래서 n명의 사람이 있다면 n개 이상의 성별 정체성이 존재할 수 있다.

실제로도 성별 정체성을 지칭하는 개념은 무척 다양하다. Agender, Bigender, Cisgender, Gender fluid, Gender Queer, Gender Variant, Omnigender, Polygender, Pangender, Transgender... 기존의 언어가 포괄하지 못하는 영역이 끊임없이 발견되며, 소외된 자들은 그 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언어화 하여 스스로를 가시화 하는 중이다.

그러니까 뉴질랜드 정부가 Male, Female에 이은 세 번째 선택지를 굳이 "Transgender, Gender Queer..."라는 식으로 나열하지 않고 Gender Diverse로 포괄한 것은 오히려 세계에 대한 가장 적확한 표현이다.


호주
호주 비자 신청 양식

호주는 논바이너리 성별 선택지를 사뭇 다른 용어로 표기하는데(indeterminate/intersex/unspecified; 미정/간성/불특정), 이는 2013년 도입된 관련 가이드라인을 따른 결과로 보인다.

호주 정부가 2013년 도입한 <성과 젠더의 확인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호주 정부는 개인이 출생 시 지정된 성 외에 다른 성별이나, 남성/여성이 아닌 성별로 정체화 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며(para. 1), 성별(sex and/or gender) 정보를 수집하고 기록하여야 하는 경우 개인에게 M(남성), F(여성), 그리고 X(미정/간성/불특정)라는 선택지를 제시할 것을 권고한다(para. 19). 이 때 X는 미지수 X로 생각할 수 있는데, 가이드라인은 "X란 오직 남성/여성으로만 정체화하지는 않는 사람, 말하자면 논-바이너리 젠더를 지칭한다(para. 20)"고 하며 개념을 열어두고 있다.

이 가이드라인은 국가 차원에서 '논바이너리'를 가시화하고 성별 정보 수집 시 제3의 선택지를 반드시 포함해야 함을 피력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단, 호주 정부가 단지 온정적인 측면에서 '제3의 성'을 다루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국가 운영의 관점에서, 정부는 시민 개개인의 신원identity과 사회적 궤적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신원identity은 생물학적 성이나 지정 성별이 아니라, (스스로 정체화한) 젠더로 구성된다. 따라서 정부가 염색체 정보보다는 젠더 정보에 중점을 두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이 가이드라인에 선행한다(para. 2).



비자 신청 시 논바이너리 성별 선택지를 제공하는 국가 중 일부 사례를 살펴보았다. 위에서 살펴본 국가 외에, 영국은 자국민의 여권에는 제3의 성을 인정하지 않음에도 비자 양식에 제3의 성이 존재하는데, 이는 여권에 제3의 성 표기가 가능한 캐나다/뉴질랜드/호주와 밀접한 관계(CANZUK)를 맺고 있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자세한 사정을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부디 친절히 답글을 달아주시면 좋겠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디쯤 와 있을까? 한국 정치인의 성인지 감수성을 보면 우리나라가 논바이너리를 공식 성별로 인정하고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일은 매우 요원해 보이긴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정부가 논바이너리의 가시화를 일부 국가의 특수 사례로 여기며 넋을 놓고 있어도 괜찮은 건 아니다. 놀랍게도 혹은 놀랍지 않게도, UN은 이전부터 다음과 같이 권고해 왔다.
  • 성별 데이터를 수집해야 하는 경우 스스로 정체화하는(self-identification) 성별을 기반으로 수집할 것 (A/73/152, para. 38)
  • 이 때 남성이나 여성이 아닌 논바이너리(Non-binary) 정체성을 포함할 것 (A/73/152, para. 39)
UN의 권고는 달리 말하면 스스로의 성별을 남성이나 여성 중 하나로 정체화하지 않는 사람도 국민으로 인정하라는 뜻이다.

국가가 특정 집단을 공적 영역으로 불러내는 것은 그 집단에게 법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누가 시민인지를 재정의하는 일, 시민의 범주를 넓히는 일이다. 또한 국가가 그들의 생명과 안전을 모른척 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약속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질문은 중요하다.
한국은 얼마나 많은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고자 하는가?



덧붙임 1)
국내 및 해외의 개인식별번호/신분증/공문서 내 성별표기 관련 법제/정책, 성별 정체성의 법적 인정(Legal Recognition) 관련 국제규범/법제/정책 등에 대해 궁금하신 분이 있다면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2020.11)를 읽어보시기를 권유드린다.

덧붙임 2)
BBC의 한 기사는 한 사회(국가)의 (1)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2) 민주주의가 발달할수록 (3) 종교적 믿음이 약할수록 성소수자에 관대하다고 설명하였는데, 이를 검증하기 위해 로지스틱 회귀분석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 종속변수는 신분증(대표적으로 여권)에 논바이너리 성별(Gender X)을 표기할 수 있는지의 여부 등이 될 것이다. 한편 독립변수로는, 한 국가의 소득 수준, 민주주의 달성의 정도, 종교적 믿음의 강도를 측정하기 위한 지표를 고민해야 하겠다. 다만 한국을 예로 들어 생각하면, (1) 국가소득수준이 높고 (2) 절차적 민주주의를 어느정도 달성했다고 여겨지며 (3) 종교가 있는 사람의 비율이 낮은 편임에도, 논바이너리 성별을 공식적으로 표기하고 있지 않다. 즉, 모델의 설명력을 높이기 위해 어떤 독립변수를 추가할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