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혁현 · 오래된 활자 중독자...
2024/05/30
  똑똑 두드리고 조용히 입장하는 사랑은 흔하지 않다. (툭툭 두들기고 상처 남기며 퇴장하는 사랑은 흔하다.) 사랑은 밤 같은 낮에 내리는 여름비처럼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채 찾아오고, 우리는 그예 흠뻑 젖는다. 자신을 젖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어느 부분이 젖은 것인지도 모르는 채, 흘러나오는 애액을 주체할 수 없어 허덕인다. 주인이 따로 있는 그곳을 못내 허락하면서도 사랑을 외치는 것, 사랑은 즐겁고도 즐겁지 않다.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꽂
  아
  다
  오

  제 몸뚱어리 잘리고 부서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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