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량, 침묵, 이념(「스파이의 아내」를 경유하여)

Orca
Orca · 제국에 관한 글쓰기
2024/03/25
1.
유려함이란 역량이다. 역량은 역량으로 간주되는 한 역량이다.  

2. 
미시마 유키오는 검도를 못했다. 일본에서 5단까지 땄지만 들려오는 얘기로는 1년 한 나랑 별로 차이 안 났을 것 같다. 미시마가 운동신경이 형편 없었으며, 목각인형이 움직이듯이 삐걱거렸으며, 전혀 유려하지 않았다는 것은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는 유명한 이야기다. 사람들은 이 일화에 대해 얘기하기 좋아한다. '검도 못한 미시마', '플라멩코 배우러 갔다가 네 운동신경으로는 무리야, 라는 말로 거절당한 미시마', '접대 유도 받지 않으면 이길 수 없었던 미시마' 얘기가 곳곳에서 유통된다. 이시하라 신타로 같은 유려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은 정당하게, 자신의 유려함의 권리(역량)를 암묵적인 뒷배로 삼은 채 이 치부를 통렬하게 지적하기를 멈추지 않아왔다. 이러한 세태에는, 이시하라 신타로의 자극적이지만 깊이 없고 단순한 통속소설과 미시마의 고상하고 우아하며 복잡한 구조 속에 정신의 깊이가 각인된 순수소설 사이의 차이가 유려함의 유무와 모종의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세간의 본능적인 직관이 게재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미시마의 극히 세심하게 조탁되어 있으면서도 장대하게 건축된 소설 세계에는, 그의 삐걱거리는 육체, 검도 못하는 형편없는 운동신경과 어울리는, 어떤 숨길 수 없는 타고난 부자연스러움이 있는 건 아닐까? 이것이 바로 "운동음치 미시마" 이미지가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왔다고 할 때 그 메커니즘을 뒷받침한 암묵적인 의심, 집요한 문제제기다.  

3.
음주가무를 못하는 사람은 못하는 것이다. 검도를 못하는 건 못하는 거다. 연기를 못하는 건 못하는 거다. 영어를, 한국말을 유려하게 못하는 건 못하는 거다. 도대체 왜, 라고 물어도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잘하는 영어라는 게 원래부터 있는 게 아니야!" "하나의 영어가 아니라 무수히 다양한 영어가 있는 거야!"라고 말해도 불평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못하는 자들은 열등감을 갖고, 사람들은 못하는 자들을 차별할 것이다. 유려함이 야기하는 불평...
얼룩패스
지금 가입하고
얼룩소의 모든 글을 만나보세요.
이미 회원이신가요? 로그인
연극 6년, 방공통제사 3년, 석사 생활 3년
32
팔로워 3
팔로잉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