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기 말 선전/뉴스영화의 범람과 전문 관객의 등장

강부원
강부원 인증된 계정 · 잡식성 인문학자
2024/02/12
식민지 시기 말 총력전 체제하의 선전영화와 뉴스영화. 출처-한국영상자료원

식민지 시기 말 선전/뉴스영화의 범람과 전문 관객의 등장 
   
정책적 보급과 선택적 수용
   
태평양전쟁이 한창이었던 1942년부터 정책당국은 대대적인 농촌 이동 영사 활동을 벌여나갔다. 이동 영사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을 겨냥하고 있었다. 첫째는 생산 현장에서 일하는 농민, 노동자에게 영화라는 검증된 ‘건전오락’을 제공해 생산력을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여기서 건전오락 영화란 국가의 전쟁 승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며 땀 흘려 일하는 총후 국민의 모습을 담고 있는 문화영화이거나 전쟁의 소식을 뉴스의 형식으로 전달하는 뉴스영화였다. 

1943년 들어 “금후 새 영화의 배급은 먼저 공장 광산 등의 생산 부문”을 중심으로 하고 “도시의 기설 영화관은 부차적”으로 한다는 방침을 정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전쟁의 확대에 따른 생산력 확충을 위해 선전영화의 상영은 농촌이나 광산 등의 지방 생산 현장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하고 있었다. 

이동 상영의 둘째 목표는 농촌 구석구석 징병제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것이었다. 징병 실시 초기와 달리 1940년대에 접어들어 전쟁이 확대되면서 지원병의 수요는 급격히 증가했다. 이는 정규 교육 제도권 내의 도시 청년뿐만 아니라 농촌 청년들에게까지 전쟁 동원의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따라서 당국으로서는 농촌의 청년들이 징병에 적극적으로 응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지원병의 80%가 농촌 출신으로 채워졌다는 사실에 기초해 볼 때 선전영화의 이동 상영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그 효과 또한 그럴듯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극장 사정이 좋지 않았던 농촌 지역에서는 당시까지만 해도 영화 자체에 대한 호기심과 열광이 남아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국의 이동 상영 프로그램은 상당히 인기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농촌의 이동 상영 역시 거의 다...
강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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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신문과 오래된 잡지 읽기를 즐기며, 책과 영상을 가리지 않는 잡식성 인문학자입니다.학교와 광장을 구분하지 않고 학생들과 시민들을 만나오고 있습니다. 머리와 몸이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연구자이자 활동가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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