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와 예언자, 카트린 데 메디치와 노스트라다무스
2023/03/14
16세기의 유럽
중세의 유럽인에게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라고 물으면 꽤 당황할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일 것이다. 반면에 '누가 당신의 주인입니까?'란 질문에는 아주 쉽게 대답할 것이 틀림없다. 다만 우리의 기대와 달리 '영국왕' 혹은 '프랑스왕' 같은 군주를 언급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 것이며 대부분은 공작과 백작의 이름을 댈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중세에는 프랑스, 영국, 독일 같은 국가의 구분이 매우 약했다. 영국왕이 오랫동안 노르망디 대공의 지위를 겸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듯, 오늘의 우리에게 친숙한 '국민국가'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중세 유럽은 교황이 이끄는 카톨릭 교회와 황제가 이끄는 신성로마제국을 축으로 '하나의 통합된 사회'에 가까웠다. 그래서 자신을 직접 통치하는 봉건영주에 대한 소속감은 있었으나 왕에 대한 유대는 크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의 경계가 애매했고 때로는 거의 통합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도 서로 구분하기 힘들었다. (오늘날의 체코와 오스트리아도 당시에는 독일에 해당했으며 독일인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일 때가 많았지만 정작 황제는 볼로냐 같은 이탈리아 도시에 주로 머물렀다.) 스페인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으며 폴란드와 헝가리에는 독자적인 왕이 있었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그들의 선임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당시 유럽은 오늘날의 유럽연합보다 훨씬 통합된 공동체였다.
그러나 어떤 통합도 영원하지 않다. 1347년부터 1350년까지 유럽을 휩쓴 흑사병이 '하나의 유럽'을 무너뜨리는 방아쇠를 당겼다. 페스트로 짧은 시간에 유럽인구의 1/3이 사망하자 사람들은 '하나님과 카톨릭 교회'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감히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없었지만 '교황이 신의 대리인이 아니다'란 불온한 생각을 품는 사람이 생겨났다. 또, 인구가 줄어 노동력이 귀해지면서 농민의 신분이 상대적으로 상승했고 지배층은 자금부족에 시달렸다. 카톨릭 교회의 사정도 비슷해서 부족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