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 한계를 딛고 꽃 피운 장인의 솜씨 - 바이올린 마스터 메이커 진창현

강부원
강부원 인증된 계정 · 잡식성 인문학자
2023/03/31
전세계 5명뿐인 바이올린 마스터메이커 자리에 오른 진창현(왼쪽)과 그의 후계자인 아들 진창호(오른쪽). 출처-진공방((https://www.jinviolin.com)
바이올린 마스터 메이커, 진창현(陳昌鉉, 1929~2012)
   
일본 바이올린 제작자 간첩 사건 
   
한일국교가 정상화 된 이후 1968년 고향 경북 김천을 방문한 일본 교포가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다. 대공 혐의였다. 일본에서 바이올린을 제작하는 공방을 열어 자수성가한 뒤 25년 만에 실행한 고향 방문이었지만, 간첩으로 몰려 붙잡혀 가는 통에 부모님 산소도 그리운 옛집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중앙정보부로 끌려간 그는 으레 그렇듯 모진 고문부터 받았다. 
   
자기는 일본에서 바이올린 만드는 사람일 뿐, 간첩이 아니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가 고국에서 간첩 혐의로 구속됐다는 소식이 일본으로 전해지자 명망 있는 일본 음악인들이 발 벗고 나서 그의 무고를 청원했다. 결국 일본 경찰의 신원 보증을 받고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되돌려 생각하기 싫은 아찔한 경험이었다. 
   
그를 간첩으로 신고한 사람은 어이없게도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그의 성공에 질투심을 느낀 이복형이었다. 그의 국적 문제가 아리송했던 사정도 중앙정보부의 의심을 사 쉽게 풀려나지 못했던 원인으로 생각된다. 일본에 살고 있던 그는 일본 국적자가 아니었으며, 대한민국 국적도, 북한 국적도 아닌 ‘조선적(朝鮮籍)’을 유지하고 있던 수상쩍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적’은 해방 이후 군정 체제 하에서 재일 동포들에게 부여한 임시 국적이었다. 남북 각각 단독 정부를 수립한 이후 재일 동포들은 남한과 북한 중 하나를 선택해 국적을 변경했다. 여러 사정 때문에 국적 선택을 미룬 교포들이 일부 있었는데, 이들은 일본은 물론 남북 양측으로부터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일종의 무국적자였기 때문이다. ‘조선적’을 ...
강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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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신문과 오래된 잡지 읽기를 즐기며, 책과 영상을 가리지 않는 잡식성 인문학자입니다.학교와 광장을 구분하지 않고 학생들과 시민들을 만나오고 있습니다. 머리와 몸이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연구자이자 활동가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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