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혁현 · 오래된 활자 중독자...
2024/05/31
2019.5.29.
얼마 전 아내와의 여행에 세 권의 책과 동행했다. 한 권은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였고, 또 한 권은 파스칼 키냐르의 《섹스와 공포》였다. 파스칼 키냐르의 번역 출간된 모든 책을 열심히 읽었는데 《섹스와 공포》만은 몇 차례 읽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이번만큼은 모두 읽을 작정이었다. 제발트는 접근하기 공포스러워 주저하고 있는 작가였지만 그 시작은 《토성의 고리》여야만 한다고 여겨왔다.
 “기억이란 참 이상하다. 실제로 그 속에 있을 때 나는 풍경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딱히 인상적인 풍경이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열여덟 해나 지난 뒤에 풍경의 세세한 부분까지 기억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솔직히 말해 그때 내게는 풍경 따위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그때 내 곁에서 걷던 아름다운 여자에 대해 생각하고, 나와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그리고 다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뭘 보고 뭘 느끼고 뭘 생각해도, 결국 모든 것이 부메랑처럼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마는 나이였다... 그렇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 우선 떠오르는 것은 그 초원의 풍경이다. 풀 냄새, 살짝 차가운기운을 띤 바람, 산 능선, 개 짖는 소리, 그런 것들이 맨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그 풍경 속에 사람 모습은 없다. 아무도 없다. 나오코도 없고 나도 없다. 우리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나는 생각해 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그렇게나 소중해 보인 것들이, 그녀와 그때의 나, 나의 세계는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그래, 나는 지금 나오코의 얼굴조차 곧바로 떠올릴 수 없다. 남은 것은 오로지 아무도 없는 풍경뿐이다.” (pp.12~13)
 그리고 나머지 한 권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나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책을 읽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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