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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이경미가 에세이를 쓰는 이유

이경미
이경미 인증된 계정 · 감독, 작가.
2024/01/08
alookso 유두호
2018년 여름,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에세이가 한 권 있습니다. 출간 1주일 만에 3쇄를 찍으며 화제를 모았던 영화감독 이경미의 첫 책 『잘돼가? 무엇이든』입니다. 당시 독자들은 "쓰레기를 쓰겠어! 라고 결심하니 써지긴 써진다.(144쪽)"고 밝힌 이경미 감독의 구체적인 솔직함에 크게 놀랐는데요. 이 문장 덕분에 글쓰기에 용기를 갖고 도전하게 되었다는 독자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5년 만에 개정증보판을 펴낸 이경미 감독을 <얼룩소>가 만났습니다. 

2024년이 벌써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2018년부터 2023년까지는 넷플릭스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와 공포 영화<새색시(가제)> 각본을 썼어요. <보건교사 안은영>을 촬영하는 동안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고 , 저는 길고양이 두 마리를 입양했지요. <보건교사 안은영> 촬영 중이라서 아버지와의 이별을 충분히 치르지 못 한 채 보내드렸어요. 개정증보판을 쓰면서 비로소 아버지를 보내드린 기분을 가질 수 있게 됐는데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미국 소설 원작으로 드라마 각본 작업을 시작했어요. <새색시> 촬영이 들어가기 전에 드라마 각본을 정리하는 게 올해 목표예요. 

책을 다시 읽는데 깜짝 놀랐어요. 5년 전에 읽었던 글들이 너무 생생하게 떠올라서요. 오래 전 글을 다시 정리한 소감이 궁금합니다. 

처음 개정증보판을 제안 받았을 때는 가볍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책을 내려고 하니까 마음이 쓰이기 시작했어요. 책을 이미 읽으신 독자들을 실망 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출간 이후 5년의 기록을 조금 덧붙이자고 했죠. 2년간 일기를 써서 출판사 대표님께 글을 보냈는데 작년 여름, 전체 편집본을 보는데 5년 전 제 책이 너무 낯설었어요. 그동안 여러 일을 겪어서 그런지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무슨 말을 썼는지 이해도 안 되고. 무엇보다 너무 창피했어요. 내가 왜 쉽게 생각하고 고민 없이 도장을 찍었을까? 이제 와서 못 하겠다고 하면 대표님은 충격이 크겠지? 후회했죠.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는 사실 남편의 책 『필수는 곤란해』 의 추천사를 쓰면서였어요. 출판사에서 추천사를 부탁했고 저는 여러 차례 (정말 어렵게) 거절했어요. 그런데 남편의 책이 인쇄가 들어가기 전 날 박찬욱 감독님으로부터 문자가 왔어요. “너의 쑥스러운 맘은 알겠지만 책이 팔리기를 바란다면 너의 추천사는 필수라고 본다.”고요. 그래서 급하게 마음을 먹고 추천사를 썼죠. 왜냐하면 남편의 책 제목도 지어주시고 추천사까지 써주신 박 감독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제가 끝까지 거절한다면, 그것은 '남편의 책에 아내가 추천사를 쓰는 일’보다 더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갑자기 용기가 생겼나요?
 
네, 진짜 하기 싫은 걸 하겠다고 마음 먹었더니 갑자기 용기가 생기면서 개정증보판에 관한 마음가짐이 달라졌어요. 참 이상한 일이죠. 그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개정판 첫 장의 세 문장을 쓰는 일이었어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정말 하루 종일 썼어요. 원래는 그 자리에 '사랑하는 아빠에게'였는데 볼 때마다 너무 창피하고 거짓말 같아서 미치겠는 거예요. 정말? 이렇게 단순하게 표현해도 괜찮을 만큼 이게 나한테 지금 간단한 문제인가? 이 질문을 계속 갖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문장부터 당장 고쳐야 했는데 이게 왜 이렇게 하루 종일 걸렸냐면, 제가 아빠와 충분히 이별을 치르지 못 하고 갑작스럽게 보내드려서 정리를 못 한 채 여기까지 와서 지금의 세 문장을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나의 끈기와 불만족은 아빠가 키워준 거야. 
 덕분에 난 무너지지 않지. 
 그러니까 미안해하지마, 아빠.
 
세 줄을 쓰고 나니까 비로소 이 책을 어떻게 완성해야 될 지 감이 왔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출판사 대표님 역시 저 세 줄을 메일로 받고 나서 느낌이 왔다고 나중에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날부터 5일 동안 첫 글부터 다시 점검했어요. 무엇보다도 신기했던 건 저는 5년 전에 책을 낼 때, 아버지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었거든요. 엄마와 동생에 비해 아빠를 상대적으로 덜 다루어서 아빠가 서운하겠거니 짐작했었어요. 그런데 다시 들여다보니까 새로 쓴 글들과 맞닿아 있는 부분들이 이미 곳곳에 많이 자리 잡고 있더라고요. 제 이야기 안에는 아버지의 자리가 이미 많이 있었어요. 

힘든 시간이었겠어요.
 
저는 각본 작업에 깊이 빠져있을 때 몸이 아프거든요. 정말 격한 운동을 한 것처럼 몸이 아파요. 그런데 이 책을 수정하던 4-5일 동안 침대에 누우면 온 몸이 아팠어요. 아버지와의 이별에 대한 의미를 찾고 나니까 5년 전의 글들이 새롭게 보였어요. 새 글들을 덧붙이고 전체를 다시 보니까 비로소 이 책이 완성 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이 나왔을 때 여러 반응들을 걱정하다가 “생각보다 사람들은 나한테 관심 없어”라는 생각을 한 후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고 하셨죠. 하지만 책을 내면 리뷰를 엄청 찾아보게 되고, 오해를 받는 게 속상해지기도 합니다. 감독님은 어떠셨나요? 

별로 속상하지 않아요. 무엇이든 결심하기까지가 어렵지 결심하고 나면 괜찮아요. 그리고 이 책으로 인해서 무언가 특별하게 크게 더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어서 괜찮아요. 그냥 살다 보면 겪게 되는 재미있고 소소한 이벤트라고 생각하자 마음 먹었어요. 어제 남편과 <씨네21> 인터뷰를 했는데 남편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제게 일상은 창작의 중요한 영감이라는 점을 저와 살면서 깨달았다고. 그렇다면 제게 이 에세이 작업은 영감을 위한 저축통장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감을 잘 지키시는 것으로 유명하죠. 다만, 마감한 후에도 끝까지 고치는 성격이시고요.
 
네, 맞아요. 각본이든 책이든 마감 일을 잘 지켜요. 그런데 마감일을 맞추면서 완벽한 결과를 낸다는 야심은 없어요. 마감을 맞추고 나면 그제야 보여요. 무엇을 수정해야 되는지. 그래서 마감 일을 맞춘 뒤에 계속 수정해요. 마감을 수없이 하면서 마지막까지 수정해요. 각본을 쓸 때도 탈고를 셀 수 없이 많이 해요. 뭐든 저지르고 나야 무엇을 수습해야 하는 지 보여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 챕터 '파리에서, 아녜스 바르다'가 소중해요. 이 챕터 역시 처음부터 계획한 책의 결말이 아니라 쓰다가 보니 저의 이야기가 거기에 도달했어요. 책을 다 쓰고 보니 결국 제 직업과 제 꿈에 대한 욕심으로 이야기를 마쳤다는 사실이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3부를 여는 장에 이런 문구가 있죠. “영화를 시작하게 만드는 것은 머리지만, 영화를 완성시키는 것은 마음이다. 아니다. 영화는 마음으로 시작해서 머리로 완성한다.” 지금의 생각도 동일한가요? 새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네. 그렇게 생각해요. 영화를 만드는 일은 무엇을 설계하고 작전을 짜는 일 같아요. 그래서 머리를 많이 써야 해요. 완성하기 까지 과정도 결코 쉽지 않지요. 어려운 순간도 많고 다 그만 두고 싶은 기분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완성 시키게 만드는 동력은 마음인 것 같아요. 처음에 이것을 시작하게 만든 내 마음. 그 마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미친듯 머리를 써야 해요. 새 작품을 시작할 때 어떤 생각을 하는 건 없어요. 그냥 "오래 놀지 않으려면 빨리 일을 잡아야 한다"는 일념?
 
영화감독이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써놓은 글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어요. 읽을 때마다 놀라요. 애증도 느껴지고, 신기할 만큼의 사랑도 느껴지고요. 2018년 서문에 “이 책의 절대적 존재 이유이자 의미인 나의 부모님”이라고 썼고, 개정판 서문에는 (성우이며 연극 연출가였던) 아빠의 유언이 실렸죠. 아빠와의 대화를 이렇게 세세하게 기억하는 딸이 있을까 놀라워요. 아빠의 말은 이경미에게 왜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될까요?
 
아빠는 제게 늘 신경 쓰이는 존재였거든요. 저는 소리에 아주 민감해요. 그 감각이 제가 영화를 만들 때는 아주 유용하게 쓰여요. 제가 만든 그림에 덧붙여지는 소리를 설계하고 디자인하는 일에 관심이 많아요. 제가 소리에 민감하게 된 건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훈련된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 무슨 훈련인고 하니 아빠의 숨소리, 발소리, 기침 소리, 일어나는 소리, 눕는 소리. 등등. 아빠와의 관계가 제 마음 속에서 편안하지 못 했기 때문일 거예요. 그와 동시에 아빠는 아주 믿음직한 저의 보호자였어요. 저는 자라면서 ‘내게 아주 나쁜 일이 생기더라도 나는 아주 나쁜 상황에 처하지 않을 거야, 나한테는 아빠가 있으니까’ 와 같은 믿음이 있었지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아빠에 대한 저의 판단과 입장이 바뀌어요. 지금은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아빠랑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었는데, 우리는 어쩌면 농담을 많이 주고 받을 수 있는 사이가 될 수도 있었는데 왜 나는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 했을까. 아빠는 계속 시도했었는데, 그런 아쉬움.

피어스 콘란 작가와 이경미 감독 (사진 제공 : 유선사)

남편이자 영화인 피어스 콘란의 첫 책 『필수는 곤란해』 가 앞서 출간되었죠. 아내이자 독자의 응원 리뷰가 재밌고 따뜻했습니다. 본인의 책보다 더 애정이 더 큰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요. 왜 남편에게 책을 쓰라고 부추기셨나요? 

피어스가 출판 제안을 받고 너무 오랫동안 고민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라고 부추겼어요. 이렇게 긴 시간 고민할 정도로 고민이 된다면 그냥 해라. 피어스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정말 많이 보고 분석하면서 일생을 바치고 있는데 그가 쏟아붓는 시간과 노력만큼 뜻을 나눌 수 있는 동료와 친구들을 만나지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이 늘 안타까웠어요. 한국어로 피어스가 제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면 조금 덜 외로워질 수 있을라나. 기대했던 마음도 있었어요.
 
 『필수는 곤란해』에 이경미 감독님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곤란하진 않으셨어요?
 그러니까 추천사를 써야 되는 제 심정이 얼마나 곤란했겠어요. 

주6일제를 했던 시절에 직장을 다니셨지요? 만약 영화를 공부하지 않았고 감독이 되지 않았고, 회사원으로 지금까지 살았다면 어땠을까요? 

지금까지 변비로 고생하면서 살겠지요. 변비는 제가 태생부터 가진 질병이었는데 영화학교 들어가면서 거짓말처럼 없어졌거든요. (제 책에도 나오는 에피소드….)
 
영화를 너무 하고 싶은데,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신가요?
 
남편이 영화를 너무 좋아하고 영화를 너무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에요. 지금은 평을 쓰는 기자가 됐지요. 물론 앞으로 그가 무엇이 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 그런 분들께 제가 특별히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어요.  뭔가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영원한 기쁨과 슬픔을 남편을 통해서 알고 있거든요. 한 가지 확실한 건 뭔가를 너무 좋아하는 마음은 삶을 풍요롭게 해줘요. 계속 탐구하고 새로운 걸 발견하고 싶어하거든요.
 
2023년에 봤던 영화 중에 최고의 작품은 무엇이었나요?

잉마르 베르히만의 TV 드라마 <결혼의 풍경>이 참 좋았어요.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솔직한 이야기를 도저히 못 쓰겠다, 그런데 내 삶을 글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으세요? 

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면 써보세요. 욕망이 있다면 참아서 뭣해요,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도 아닌데 해봐야죠. 욕망이 없다면 굳이 솔직해질 필요까지는 없지만요.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보건교사 안은영> 각본, 연출.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 <아랫집> <러브세트> 각본, 연출. 에세이 <잘돼가? 무엇이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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