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운명에 맞서 자유를 꿈꾸었던 문학소녀 - 전혜린

강부원
강부원 인증된 계정 · 잡식성 인문학자
2023/03/21
전혜린. 출처-동아일보

1960년대를 강타한 고독한 영혼의 상징, 전혜린(田惠麟, 1934~1965)

어떤 날 - 전혜린(1960년 7월 25일)
   
나의 운명이 고독이라면,
그렇다, 그것도 좋다. 
이 거대한 도회의 기구 속에서 
나는 허무를 뼛속까지 씹어보자. 
몇 번씩 몇 번씩 
나는 죽고 죽음 속에서, 
또 새로운 누에가 눈뜨듯 
또 한 번, 
또 한 번! 
하면서 
나는 고쳐 사는 것이다. 
다시 더! 
하고 소리치며 
나는 웃고 다시 사는 것이다. 
과거는 그림자 같은 것, 창백한 것, 
본질은 나이고
현실은, 태양은 나인 것이다. 
모든 것은 나의 분신, 
자아의 반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버지와 딸

아버지는 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소공녀처럼 귀하게 키운 아이가 이제 곧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고단한 숲 속 길을 홀로 걷게 내버려둔 것처럼 딸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기대와 요구에 한 치도 벗어남이 없었던 딸이었다. 딸은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말을 떼고, 다섯 살도 안 돼 한글과 일본어를 영민하게 구분해 쓸 줄 알았다. 
   
조용하게 학교를 다녔음에도 최우등 성적을 놓친 적이 없었고,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서울대 법대에도 진학했다. 아버지에게 딸은 꼭 자신의 과거를 보는 듯 대견했다. 매사 수선스럽지 않고, 늘 신중하게 처신하며, 사람들에게 사려 깊은 모습을 보여주는 딸은 내내 미덥기만 했다. 슬하 8남매의 맏딸로 태어난 그녀는 아버지의 빛나는 인생에 가장 잘 어울리는 트로피 같은 존재였다. 
   
딸은 아버지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는 딸에게 “살아있는 신(神)”이자 “지상의 명령”이었다.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혼자 헤쳐 나가야 할 미래가 겁났지만 한편으로 아무런 감시나 방해 없이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행할 수 있다는 기대에 묘한 설렘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제부터 유학 생활을 할 독일 뮌헨이라는 도시는 어떤 곳일까. 공기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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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신문과 오래된 잡지 읽기를 즐기며, 책과 영상을 가리지 않는 잡식성 인문학자입니다.학교와 광장을 구분하지 않고 학생들과 시민들을 만나오고 있습니다. 머리와 몸이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연구자이자 활동가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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