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에 대한 원론적 생각들 (feat. 원론적이라는 건 무엇인가?)
2022/12/14
장지현 님과 김도훈 님의 글을 읽고 신자유주의에 대해 제 생각을 몇 가지 덧붙이고 싶었습니다.
원래 답글로 쓰려고 했지만 장지현 님의 원글에서 좀 멀리 벗어난 이야기가 되는 것 같고 실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별도 글로 작성했습니다.
다만, 원론적인 글의 수준에 그칠 것 같습니다.
제가 원론적이라고 하는 말의 뜻은, "A 아니면 B가 맞는데, 상황에 따라 A가 맞을 때도 있고 B가 맞을 때도 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원론적인 글을 많이 쓰는 편인데, 그건 자세히 깊이 들어갈만큼 지식이 많지 않으면서도 대략적인 그림은 파악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글을 쓰다 보면 그냥 당연한 얘기를 한 게 아닌가 싶은 자괴감이 들 때도 자주 있지만, 저한테는 이런 나름대로의 정리가 의미있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일단 원론을 정리해 놓고 나면, 어떤 상황에 A가 맞고 어떤 상황에 B가 맞는지, 현실은 A가 맞는 상황인지 B가 맞는 상황인지, 또는 A가 더 필요한 상황인지 B가 더 필요한 상황인지, 이런 식으로 진행해나갈 수 있는 출발점 역할은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죠. 아직까지는 대체적으로 출발점 주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말입니다.
김도훈 님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도 없으면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지 않느냐는 취지로 글을 쓰신 걸로 이해를 했습니다.
사실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일도 공부가 부족한 저로서는 쉽지 않은 일인데, 일단 시장의 경쟁 원리에 맡겨 두고 국가의 간섭은 최소화하자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핵심이라고 나름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간섭 받지 않는 시장의 작동 결과가 최선이라고 보기 때문에 별다른 조치가 필요 없다고 보는 반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선 시장에서의 경쟁이 공평하지 않다, '구조적 차별'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불공정한 경쟁이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구조적 차별'을 완화하고 경쟁에서 차별 받는 사람이나 약자를 돕고 결과도 재배분해서 ...
원래 답글로 쓰려고 했지만 장지현 님의 원글에서 좀 멀리 벗어난 이야기가 되는 것 같고 실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별도 글로 작성했습니다.
다만, 원론적인 글의 수준에 그칠 것 같습니다.
제가 원론적이라고 하는 말의 뜻은, "A 아니면 B가 맞는데, 상황에 따라 A가 맞을 때도 있고 B가 맞을 때도 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원론적인 글을 많이 쓰는 편인데, 그건 자세히 깊이 들어갈만큼 지식이 많지 않으면서도 대략적인 그림은 파악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글을 쓰다 보면 그냥 당연한 얘기를 한 게 아닌가 싶은 자괴감이 들 때도 자주 있지만, 저한테는 이런 나름대로의 정리가 의미있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일단 원론을 정리해 놓고 나면, 어떤 상황에 A가 맞고 어떤 상황에 B가 맞는지, 현실은 A가 맞는 상황인지 B가 맞는 상황인지, 또는 A가 더 필요한 상황인지 B가 더 필요한 상황인지, 이런 식으로 진행해나갈 수 있는 출발점 역할은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죠. 아직까지는 대체적으로 출발점 주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말입니다.
김도훈 님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도 없으면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지 않느냐는 취지로 글을 쓰신 걸로 이해를 했습니다.
사실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일도 공부가 부족한 저로서는 쉽지 않은 일인데, 일단 시장의 경쟁 원리에 맡겨 두고 국가의 간섭은 최소화하자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핵심이라고 나름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간섭 받지 않는 시장의 작동 결과가 최선이라고 보기 때문에 별다른 조치가 필요 없다고 보는 반면,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선 시장에서의 경쟁이 공평하지 않다, '구조적 차별'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불공정한 경쟁이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구조적 차별'을 완화하고 경쟁에서 차별 받는 사람이나 약자를 돕고 결과도 재배분해서 ...
궁금하고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대해 배우고자 노력하고, 깨달아지는 것이 있으면 공유하고 공감을 구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제가 말한 유능은 '생존에 유리한 기질' 이었습니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네요.
그리고 좋은 충고 감사합니다.
김도훈 님, 좋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론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저도 원론적인 글을 주로 쓴다는 이야기도 드렸지만), 원론 차원에선 상당히 극단적인 입장이 아닌 한 본질적으로 차이가 별로 없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취지로 말씀드렸습니다.
완벽한 평등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겠지만, 간섭 없는 시장의 결과를 좀더 평등한 쪽으로 바꿀 수 있는 여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와 방법에 대한 이견이 있는 것이겠죠.
죄송하지만, 자연도태에 대해 한 말씀 드리자면, 유능과 무능의 차이가 쉽게 판별되지는 않습니다. 살아남는 건 가장 힘이 세고 가장 빨리 달리는 동물이 아니라,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동물입니다. 사자만큼 생쥐나 두더지도 환경에 잘 적응한 동물이죠. 유능과 무능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기준으로 구분된다면, 어떤 환경이냐에 따라 같은 개체가 유능하다고 판별될 수도 있고 무능하다고 판별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인류의 종족 특성은 우수한 IQ나 체력 이전에 협동하는 능력이 아닐까 합니다. 언어 능력 뿐 아니라 정의감, 공정에 대한 욕구, 존경심, 동정심, 감정이입, 소속감, 사회적 판단력 등 다양한 역량의 기반 위에 무리가 협력함으로써 주변의 더 강한 동물들을 상대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지나친 불평등이 사회의 단합을 해치고 그로 인해 발전이 저해되거나 붕괴된 사례도 많다고 들어왔습니다.
이 역시 원론적인 얘기이고 다 알고 계신 내용이겠지만, 약육강식의 비유가 사회나 인간의 삶에 적용될 때 너무 좁은 뉘앙스로 해석되지는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덧붙여 봤습니다.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제가 쓴 글 자체가 제 프로필 설명에도 나와있듯이 '극단을 싫어하는' 글 입니다. 언젠가, 순수하게 사상만을 가지고 토론을 하게 된다면 그때에는 극단성을 띌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글이었습니다.
극에 치달은 신자유주의, 야경국가론은 그 반대의 위치하는 공산주의, 복지국가론 등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이상적 상황'을 가정하고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죠. 사회학보다는 철학에 가깝습니다.
제 의견 자체는 신자유주의 측에 가깝습니다. 구조적 차별보다는 개인의 노력이 더 큰 영향을 준다는 입장이죠. 본디, 전 신자유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였습니다. 그 반대의 것들은 언제나 이상만을 부르짖는다고 생각했기때문입니다. 오히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효율적으로 분배되는 것이 아주 합리적이라 생각했죠.
시장에서 벌어지는 고용차별, 노동자의 임금 문제 등도 해결되겠죠. 예를 들어 남녀 임금이 차이가 난다면, 기업은 여성을 고용할 것 입니다. 같은 일을 하는데, 여성의 임금이 더 낮다? 기업은 여성의 고용을 늘리겠죠. 그러다 어느 순간 '여성 노동력'의 공급이 줄면서 남녀 임금의 차이는 줄 것 입니다. 노동자에게 저임금을 주는 문제도, 어느 새에는 해결이 되겠죠. 다만 이 과정이 너무나도 번거롭고 오래걸린다는 것 입니다. 제가 태어날 때부터 있던 문제가 제가 죽고 나서도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죠.
다만 역사적으로 시장에 국가가 개입한다면 조금은 더 효율적인 개선이 일어나더군요. 그 때부터는 신자유주의만이 옳다고 부르짖는 일은 그만두었습니다.
순전히 제 입장에서 쓰자면, 구조적 차별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이전에 썼던 글에 언급했듯이요. 아무리 뜯어고쳐도 새로운 차별이 나오는 법이죠. 만약 모든 인간의 유전자를 건드려서, 기본 능력의 차이가 없는 세상이 와도, 그 '유전자를 편집하는 사람'과 '유전자를 편집당하는 사람'과 나뉘기 마련입니다.
전 사회를 자연으로 인식하는 편입니다. 유능한 개체는 유지되고, 무능한 개체는 도태되죠. 슬프지만, 이건 도덕성의 영역이 아닙니다. 자연 상태에서 각 개체들은 자신이 태어난 환경을, 구조를 탓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회가 문제다라고 외치는 이들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편안한 환경에서 선택적으로 노력하려는 종자들' 처럼 보입니다. 이런 개인적 생각은 접어두고 대화를 해야 이해할 수 있기에 제가 쓴 댓글에서의 토론은 많이 부드러운편입니다. 이 부분에서 원론적으로 보일 수 있겠네요.
온전히 사상에 관한 토론이었다면 조금은 더 입장이 바로섰을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러나 제가 쓴 글이나, 댓글에서의 토론은 삶과 결부된 이야기였습니다. 원론적인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삶은 극단보다는 원론에 가까운 법 아니겠어요?
김도훈 님, 좋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론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저도 원론적인 글을 주로 쓴다는 이야기도 드렸지만), 원론 차원에선 상당히 극단적인 입장이 아닌 한 본질적으로 차이가 별로 없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취지로 말씀드렸습니다.
완벽한 평등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겠지만, 간섭 없는 시장의 결과를 좀더 평등한 쪽으로 바꿀 수 있는 여지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와 방법에 대한 이견이 있는 것이겠죠.
죄송하지만, 자연도태에 대해 한 말씀 드리자면, 유능과 무능의 차이가 쉽게 판별되지는 않습니다. 살아남는 건 가장 힘이 세고 가장 빨리 달리는 동물이 아니라,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동물입니다. 사자만큼 생쥐나 두더지도 환경에 잘 적응한 동물이죠. 유능과 무능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기준으로 구분된다면, 어떤 환경이냐에 따라 같은 개체가 유능하다고 판별될 수도 있고 무능하다고 판별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인류의 종족 특성은 우수한 IQ나 체력 이전에 협동하는 능력이 아닐까 합니다. 언어 능력 뿐 아니라 정의감, 공정에 대한 욕구, 존경심, 동정심, 감정이입, 소속감, 사회적 판단력 등 다양한 역량의 기반 위에 무리가 협력함으로써 주변의 더 강한 동물들을 상대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지나친 불평등이 사회의 단합을 해치고 그로 인해 발전이 저해되거나 붕괴된 사례도 많다고 들어왔습니다.
이 역시 원론적인 얘기이고 다 알고 계신 내용이겠지만, 약육강식의 비유가 사회나 인간의 삶에 적용될 때 너무 좁은 뉘앙스로 해석되지는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덧붙여 봤습니다.
제가 말한 유능은 '생존에 유리한 기질' 이었습니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네요.
그리고 좋은 충고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제가 쓴 글 자체가 제 프로필 설명에도 나와있듯이 '극단을 싫어하는' 글 입니다. 언젠가, 순수하게 사상만을 가지고 토론을 하게 된다면 그때에는 극단성을 띌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글이었습니다.
극에 치달은 신자유주의, 야경국가론은 그 반대의 위치하는 공산주의, 복지국가론 등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이상적 상황'을 가정하고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죠. 사회학보다는 철학에 가깝습니다.
제 의견 자체는 신자유주의 측에 가깝습니다. 구조적 차별보다는 개인의 노력이 더 큰 영향을 준다는 입장이죠. 본디, 전 신자유주의의 열렬한 지지자였습니다. 그 반대의 것들은 언제나 이상만을 부르짖는다고 생각했기때문입니다. 오히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효율적으로 분배되는 것이 아주 합리적이라 생각했죠.
시장에서 벌어지는 고용차별, 노동자의 임금 문제 등도 해결되겠죠. 예를 들어 남녀 임금이 차이가 난다면, 기업은 여성을 고용할 것 입니다. 같은 일을 하는데, 여성의 임금이 더 낮다? 기업은 여성의 고용을 늘리겠죠. 그러다 어느 순간 '여성 노동력'의 공급이 줄면서 남녀 임금의 차이는 줄 것 입니다. 노동자에게 저임금을 주는 문제도, 어느 새에는 해결이 되겠죠. 다만 이 과정이 너무나도 번거롭고 오래걸린다는 것 입니다. 제가 태어날 때부터 있던 문제가 제가 죽고 나서도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죠.
다만 역사적으로 시장에 국가가 개입한다면 조금은 더 효율적인 개선이 일어나더군요. 그 때부터는 신자유주의만이 옳다고 부르짖는 일은 그만두었습니다.
순전히 제 입장에서 쓰자면, 구조적 차별은 결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이전에 썼던 글에 언급했듯이요. 아무리 뜯어고쳐도 새로운 차별이 나오는 법이죠. 만약 모든 인간의 유전자를 건드려서, 기본 능력의 차이가 없는 세상이 와도, 그 '유전자를 편집하는 사람'과 '유전자를 편집당하는 사람'과 나뉘기 마련입니다.
전 사회를 자연으로 인식하는 편입니다. 유능한 개체는 유지되고, 무능한 개체는 도태되죠. 슬프지만, 이건 도덕성의 영역이 아닙니다. 자연 상태에서 각 개체들은 자신이 태어난 환경을, 구조를 탓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회가 문제다라고 외치는 이들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편안한 환경에서 선택적으로 노력하려는 종자들' 처럼 보입니다. 이런 개인적 생각은 접어두고 대화를 해야 이해할 수 있기에 제가 쓴 댓글에서의 토론은 많이 부드러운편입니다. 이 부분에서 원론적으로 보일 수 있겠네요.
온전히 사상에 관한 토론이었다면 조금은 더 입장이 바로섰을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러나 제가 쓴 글이나, 댓글에서의 토론은 삶과 결부된 이야기였습니다. 원론적인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삶은 극단보다는 원론에 가까운 법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