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고대사에 열광했던 일본 고고학계의 몰락
2023/06/05
전곡리에서 미군 병사 그레그 보웬이 구석기 시대 석기를 발견한 것이 1978년이었다. 한반도에는 구석기가 없었다는 일제강점기 이래의 주장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 사실에 군침을 흘린 사람 하나가 있었다. 후지무라 신이치라는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고고학 공부를 했고, 스물세 살이었던 1973년부터 발굴 현장에 등장했다. 그는 1975년부터 명성을 올리기 위해 유물을 몰래 묻어두었다가 발견한 척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이런 수법이 잘도 먹혀서그때부터는 답사단까지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1979년에 전곡리 발굴 결과가 세상에 알려지자 후지무라는 열등감을 느꼈다. 조선 따위에 뒤쳐질 수는 없다는 심정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1981년 서른하나의 나이에 4만년 전 구석기 유물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조작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그의 발굴에 열광했다.
사기로 이룬 성과에 도취된 후지무라는 더더욱 가속 페달을 밟았다. 발굴 현장에 그가 뜨기만 하면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고, 그 연대는 점점 더 올라갔다. 세간에서는 그를 신의 손이라고 불렀다.
그의 사기극은 20년 간 지속되었다. 무려 20년을 세상을 속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1992년에는 그를 위한 연구소 '도후쿠 구석기 연구소'도 설립되었고, 그는 여기 부사장으로 재임했다. 92년에 고고학자를 위해 만들어진 아이자와 타다히로 상 1회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그러던 그의...
이 사실에 군침을 흘린 사람 하나가 있었다. 후지무라 신이치라는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독학으로 고고학 공부를 했고, 스물세 살이었던 1973년부터 발굴 현장에 등장했다. 그는 1975년부터 명성을 올리기 위해 유물을 몰래 묻어두었다가 발견한 척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이런 수법이 잘도 먹혀서그때부터는 답사단까지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1979년에 전곡리 발굴 결과가 세상에 알려지자 후지무라는 열등감을 느꼈다. 조선 따위에 뒤쳐질 수는 없다는 심정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1981년 서른하나의 나이에 4만년 전 구석기 유물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조작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그의 발굴에 열광했다.
사기로 이룬 성과에 도취된 후지무라는 더더욱 가속 페달을 밟았다. 발굴 현장에 그가 뜨기만 하면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고, 그 연대는 점점 더 올라갔다. 세간에서는 그를 신의 손이라고 불렀다.
그의 사기극은 20년 간 지속되었다. 무려 20년을 세상을 속이는데 성공한 것이다. 1992년에는 그를 위한 연구소 '도후쿠 구석기 연구소'도 설립되었고, 그는 여기 부사장으로 재임했다. 92년에 고고학자를 위해 만들어진 아이자와 타다히로 상 1회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그러던 그의...
한국에선 황우석과 비슷하죠. 결말도 그렇고.
한국에선 황우석과 비슷하죠. 결말도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