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물 샤워하면서 기후 위기 고민하기

뉴필로소퍼
뉴필로소퍼 인증된 계정 · 일상을 철학하다
2022/07/21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행복한 경험은 아니겠지만
분명 더욱 ‘진실에 가까운’ 경험이 된다.

몇 년 전 미국 소설가 벤 돌닉이 찬물로 샤워하면서 얻은 깨달음을 말해준 적이 있다. 그는 한 번도 찬물 샤워를 좋아하게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고, 실제로 그래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변했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싫어한다는 것에 대한 개념과 인식이 변한 것이다. 그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 이렇게 적었다.

“거의 모든 순간 내 마음속 뒷자리에 심술궂고 감정적인 두 아이가 숨어 있다. ‘좋음’과 ‘싫음’으로 불리는 이 아이들은 내가 무언가를 하려고만 하면 성가시게 참견한다.”


두 가지 감정과 두 가지 선택

찬물 샤워 실험은 돌닉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싫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마음속 목소리를 무시하다 보면 어느새 그 기세가 시들해지고, 마침내 찬물로도 자신이 무사히 샤워를 마칠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즉 좋음과 싫음에 과도하게 휘둘리는 사람은 자기 마음의 노예와 같다는 것이다.

돌닉이 화장실에서 겪은 일로 기후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쩌면 억지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찬물로 샤워하면 멍하게 물줄기를 맞고 있는 시간이 줄어들 테니 물절약에 효과적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거라면 몰라도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논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요즘 같은 위기 상황에서 우리가 그나마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몇 가지밖에 없다.
일러스트: 이예이 고메즈

먼저 ‘부정’을 선택할 수 있다. 위기 상황임을 부정하는 순간 우리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두 번째는 ‘절망’이 있다. 절망은 우리를 소극적으로 만든다. 세 번째는 ‘공포’다. 공포는 우리에게 겁을 줄 뿐 아니라 지도자들로 하여금 더 나은 대책을 고민하도록 유도한다. 마지막으로 취할 수 있는 태도로는 언뜻 괜찮아 보이는 '희망'이 있다. 희망은 사회적·정치적·기술적 혁신이 벼랑 끝에 내몰린 우리를 구해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희망을 품는 태도에도 마찬가지로 한계가 있다. 희망은 한 사람이 행동할 가능성을 그가 느끼는 좋음과 싫음의 한계에 가둬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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