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권과 개발독재가 낳은 괴물 - 박흥숙

강부원
강부원 인증된 계정 · 잡식성 인문학자
2023/04/27
모형 사제총을 들고 현장검증에 응하는 박흥숙. 출처-MBC
만들어진 ‘무등산 타잔’, 박흥숙(朴興塾, 1957~1980)
   
가난한 독학생이 잔혹한 살인범으로

박흥숙(朴興塾, 1957~1980)은 1977년 4월 20일 광주 무등산 덕산골에서 쇠망치로 사내 넷을 죽였다. 살해당한 이들은 무등산 일대의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기 위해 나온 광주시 동구청 건축과 녹지계 소속 철거반원들이었다. 출동한 철거반원 일곱 명 중 일찌감치 빠져나간 한 명을 제외하고 여섯 명을 모조리 때려죽이려 했다.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1977년 9월 일심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이후 고등법원에서도 항소는 기각됐고, 대법원 역시 원심을 받아들여 사형이 확정됐다. 광주교도소에서 3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하다 1980년 12월 24일 형 집행을 당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그 해 겨울 광주에서 일어난 최초의 사형 집행이었다. 

이 사건은 집을 잃은 철거민의 절규와 막다른 길에 내몰린 빈민의 마지막 저항의 관점으로 다뤄지지 않았다. 호사가들은 살해범 박흥숙을 ‘무등산 타잔’이라 불렀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박흥숙은 “무등산을 날다시피 뛰어 오르고”, “흉내 낼 수 없는 무공을 익혀 이소룡도 당하지 못할” 정도의 대단한 무술가로 묘사됐다.
박흥숙은 당대 가장 인기있던 액션 배우 '이소룡'을 따라해 보고 싶었던 평범한 사내이자, 공부를 더 열심히 하기 위해서는 강인한 체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소시민이었다. 출처-MBC

그러나 실제로 그는 165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는 키에 마른 몸을 가진, 당시 한국 남성의 평균 신체 조건에도 미치지 못하는 왜소한 사내였다. 그가 날다람쥐마냥 무등산을 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집이 몹시 가난해 광주 시내에 기거할 집이 마땅치 않아, 산 깊숙한 곳에 토막을 짓고 살 수 밖에 없었...
강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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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신문과 오래된 잡지 읽기를 즐기며, 책과 영상을 가리지 않는 잡식성 인문학자입니다.학교와 광장을 구분하지 않고 학생들과 시민들을 만나오고 있습니다. 머리와 몸이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연구자이자 활동가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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