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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인은 우리 사회의 이방인이 아닐까

출처: Unsplash.com
노트북 배터리 표시 아이콘의 색칠된 부분이 줄어들고 있었다. 작업을 계속하려면 충전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콘센트를 찾아 카페 안을 돌아다니다가 눈에 띈 광경이 있었다. 전망 좋은 위치에 외국인 여성 서너 명이 앉아있었다. 먹음직스러운 케이크가 담겨 있는 접시를 사진으로 남기고 각도를 바꿔가며 셀카를 여러 장 찍는 모습이 그 나이대 젊은 한국 여성들과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마침내 구석의 콘센트를 찾아 노트북에 어댑터를 연결시키고 새로운 자리에 앉았다.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두 남자의 대화는 조용한 동시에 활발했다. 그들이 수어로 의사소통하는 농인이었기 때문이다.

한 테이블에선 외국어로 이야기를 하고, 조금 떨어진 또 다른 테이블에서는 수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둘 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낯선 언어였다. 카페에선 시종일관 한국 최신 가요를 배경음악으로 틀었다. 내가 가사를 정독해야 팝송의 감성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그들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의 감성을 온전히 느끼지는 못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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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생소하고 두려운 것들 천지였다. 배정된 숙소에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그 도시에서 가장 악명 높은 우범지대가 펼쳐진다는 사실을 유학원에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데 나는 당장 필요한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리로 나와야 했다. 스쳐가는 행인들 사이사이 누가 봐도 정신이 멀쩡하지 않은 노숙자들이 꽤 많이 보였다. 그들이 금방이라도 내게 접근할 것만 같았다. 어학연수를 하겠다고 샌프란시스코 도심에 발을 디딘 첫날, 나의 심리 상태가 위와 같았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영어로 제법 유창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고 미국에서의 생활은 일상이 되어갔다. 하지만 내가 근본적으로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귀국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지인의 소개로 매달 봉사활동을 갔던 서울의 어느 농아원에서, 커다란 장벽이 되었던 건 다름 아닌 나의 움츠러든 마음이었다. 농아원의 선생님과 아이들은 대개 수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인공와우를 장착한 몇몇 아이들은 아주 크게 말하면 상대방의 목소리를 어렴풋이 분간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들에겐 수어가 음성언어보다 편한 듯했다. 봉사를 하던 동료들 중에서 대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수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내 지인 한 명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어딘지 주눅 들어 있었다. 아이들에게 간단한 의사 전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해 다른 분이 수어로 통역을 해 주셨을 때,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일제히 취했던 손동작이 '감사합니다'라는 뜻의 수어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점점 작아졌다. 샌프란시스코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똑같았다. 그곳에선 내가 소수자였고 외국인이었고 이방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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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서툰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쩔쩔매는 외국인을 볼 때 혀를 차며 잔소리를 늘어놓는 한국인들이 있다. "한국에 왔으면 한국말을 써야지!" 그들의 행동을 손쉽게 나무라고 그들의 상황과 의지를 손쉽게 판단한다. 한국어가 초보적인 수준인 외국인이나 교포 2, 3세와 같은 사람들을 아예 어린아이처럼 취급하기도 하며, 그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거나 자신의 목적에 이용해먹으려는 악질적인 시도 또한 적지 않다.

농인을 비롯한 청각장애인 역시 음성언어로 소통하기를 노골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강요받는 경우가 많다. 숱한 부작용과 엄청난 비용을 감수하며 인공와우 수술을 받는다. 어릴 때부터 발성연습을 하고 청인의 입모양을 읽으며 구화(口話)로 의사소통을 한다. 김초엽 작가가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기술에 힘입어 음성언어로 말하는 농인의 모습을 감동적인 드라마로 포장하는 TV 광고까지 나왔다. 반면 청인은 농인과 대화하려 수고를 들이지 않는다. 청인 입장에서 주류 사회에 편입되려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사람은 이방인인 농인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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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이 시각, 나는 화상 영어 회화 업체의 레벨 테스트를 세 차례에 걸쳐 받고 있다. 외국인을 일상에서 만날 일도 영어로 말을 할 일도 거의 없다가 5~6년 만에 다시 사용하는 영어가 편치는 않다. 하지만 단순한 취업 스펙만이 아니라 더 넓은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통로로서의 외국어를 공부하는 일은 내 시야를 크게 확장시켜 줄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어제는 경기도수어교육원 홈페이지에 들어가 기초 수어 강좌의 비용과 스케줄을 알아보았다. 약 두 달간 15회의 줌(ZOOM) 강의를 듣는 데에 겨우 2만 원밖에 들지 않는다. 전문 강사에게 외국어를 배운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파격적인 가격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회기는 아쉽게도 접수가 마감되었으니 내년에 시작될 다음 회기에는 놓치지 않고 신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청각장애인 인구는 약 37만 명이다. 매년 수능 응시자가 약 60만 명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생활 반경에서 그들을 만나기가 힘든 이유는 그들의 존재가 어떤 이유로든 세상 속에서 비가시화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취업 스펙과 자기 계발, 외국인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어학 공부를 평생에 걸쳐 하고 있다. 수어를 배우는 일은 단발성 이벤트나 장애인에 대한 일방적 시혜가 아니라 청인의 세계를 확장시켜줄 수 있는 또 하나의 외국어 공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