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에모] 일

홈은
홈은 · 15년차 집돌이
2023/02/16
일터가 집인 주부에게 여행은 큰일이다. 퇴근도 휴가도 없는 직장에서 일이 곧 삶이고 생존인 생활을 지속하다 보면 일하지 않는 삶은 두렵게 여겨지기도 한다. 나의 존재 가치가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여행을 결심한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일이다. 좋아서 하는 일인지 아닌지도 모를 정도로 무감하게 해 왔던 일들을 내려놓고 여행을 떠났다. 국도 반찬도 준비하지 않고 냉장고를 텅텅 비운 후 모든 집안일과 절반의 육아를 남겨두고 비행기에 올랐다. 끄지 않아도 되는 핸드폰 전원을 끄고 뜨개질을 하다 기내식이 나오면 식사를 하고 불이 꺼지면 잠을 잤다. 입국 심사 줄에서는 딸과 끝말잇기를 하며 책을 읽었고 숙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는 낮잠을 잤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지만 일은 하지 않는 시간이 어색할 줄 알았는데 어색함마저 한국에 두고 온 듯 자연스러웠다.

좋아하는 일만 했다. 짐을 풀어 옷을 정리하고 화장품을 일렬로 세워두는 일은 좋아하는 일이다. 빨래를 하고 쌓여있는 물건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도 좋아한다. 신선한 과일을 탁자에 올려두고 먹고 싶을 때마다 집어 먹었다. 뜨개질을 하며 텔레비전을 보고 빨래를 개며 어제 쓴 돈을 생각했다. 글을 쓰고 싶으면 글을 쓰고 수다를 떨고 싶으면 밤새 이야기를 했다. 도시를 이동할 땐 한국에서 챙겨간 책을 읽었다. 아이를 잘 구슬려 가고 싶은 곳의 절반 정도를 다녀올 수 있었다. 애초에 12일 동안 2가지 정도의 계획만 가지고 출발한 여행이었기 때문에 뭘 더 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없었다. 남는 것이 시간이었다.

하루 걸러 한 번씩 미술관에 갔다. 미술관 레스토랑이나 카페에서 식사를 하고 굿즈샵에서 돈을 썼다. 모든 작품을 다 봐야 한다는 생각도 없어서 가고 싶은 전시실만 다니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며 놀았다. 조르조 데 키리코의 사랑의 노래를 보며 수술용 장갑이 꼭 우리집 부엌의 고무장갑 같다며 킥킥거렸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의 다뉴브에 등장하는 벨베데레 앞에서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떡볶이와 잔치국수를 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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