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거꾸로 산다.

진영
진영 · 해발 700미터에 삽니다
2024/11/23
'내가 왜 이  고생을 사서 하노. 두고봐라. 내년부턴 절대 이 짓 안한다.'

배추를 다듬으며 그 결심을 백 번도 더 했다.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다. 배추를 밭에서 뽑을 때부터 이미 체력의 한계가 감지되었다. 쑥쑥 잘 뽑히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죽어라 버티는 것들도 있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정 안 뽑히겠다 발버둥치는 것들은 놔두고 내게 몸을 맡기는 것들만 뽑아 크기대로 가지런히 줄을 세웠다. 막상 뽑아 보니 생각보다 양이 꽤 많았다. 그 많은 것 중 알이 단단하게 앉아 김장 배추감으로 합격인 건 불과 10포기도 되질 않았다. 나머진 푹신푹신하거나 거의 얼갈이배추 수준이다. 지난 여름이 너무 위대했고 너무 길었던 탓에 누렇게 떠서 주저앉았다가 시원해지며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자라느라 몸집을 키울 여력이 없었나 보다. 그런데도 가물어서인가 쉽게 뽑히질 않았다.

"남은 건 자기가 뽑아요. 난 못 하겠으니."

남편이 오더니 너무 쉽게 뽑는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인다.

"잘만 뽑히네. 요령이 없어서 그런거지."

진즉에 요령 좋은 사람에게 다 시킬 걸 그랬네.
배추는 상태에 따라 상 중 하로 나누고 골고루 박스와 포대에 담아 형님댁에 갖다 드릴 것부터 빼 놓았다. 형님이 배추 모종을 사 주신 터라 나눠 드리는게 제법 신경이 쓰인다. 좋은 걸로 보내드려야 하는데 몽땅 다 좋은 걸로만 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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