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섭이 단독으로 벌인 오사카 3.19 독립운동
염상섭의 자기 찾기는 도쿄와 교토에서의 8년간의 역정이었다. 염상섭의 자기 찾기는 일본의 근대 교육을 통해서였다. 이는 염상섭의 자아 형성기의 통과제의 과정이었다. 그만큼 염상섭의 경도부립 제2중학교의 교육은 염상섭의 자아 형성의 원형질이었다. 염상섭이 유독 중학교 과정을 일본의 명문 학교에서 마침으로써 그에게는 남다른 긍지와 자존심이 생겼다. 염상섭이 경도부립 제2중학을 졸업한 것은 1918년 3월이었다. 2년 6개월의 경도에서의 학업을 마친 염상섭은 다시 동경으로 왔다. 일본에 온지 6년이 되었고 그의 나이 21세였다.
염상섭이 스루가에서 방황과 반동적 기분에 싸여 아르바이트로 기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동경의 조선 유학생들 사이에는 독립운동의 모의가 암암리에 진행되었다. 그들은 재일본 조선 청년 대표단을 조직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와세다대학의 송계백, 최팔용, 이광수, 경응대학의 김철만, 김도연, 이종근, 변희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