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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성의 함정 : 얼룩소로 보는 '정의론'

 공정성이란 무엇일까요?
공정성은 Justice(정의)를 뜻하기도 하고, Equity(형평)을 뜻하기도하며, Equality(동등성, 평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공정성'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시나요? 위 용법은 각기 조금씩 다릅니다.

 정의로운 방식이 반드시, 양적인 '형평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부자건, 가난한 이건 상관없이 동일한 세금 비율을 내면 정의로운 것일까요? 아니면 동일한 세금 액수를 내는 것이 정의로운 것일까요? 어느쪽이 정의롭다고 생각하세요? 혹은 누군가는 국가에 원치않는 세금을 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수도 있겠지요.

 정의가 반드시 '동등성'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예컨대 '남자'가 군대에 가니까 '여자'도 군대에 가라는 논리가 '정의'로운 것일까요? 위와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남자든 여자든 군대에 자신의 자유의사와 무관하게 끌려가야 하는 상황 자체가 부정의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정의로운가요?

 이 문제들은 하나같이 답하기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무언가가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공정성에 대한 논의는 근본적으로 '정의'에 대한 논의를 포함해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정의에 대한 논의가 빠진 채로 논의되는 공정성은 결국 경쟁적인 '게임의 룰'이 누구한테 유리하고 불리하냐만을 따지는 문제로 축소되고 맙니다. 공정성의 함정은 이것입니다. 경쟁이 왜 필요한지, 그리고 경쟁이 정말 개개인을 성장시키고, 사회적 공공선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도 고민해야겠죠.

아래부터는 최근 박현안 님께서 작성한 얼룩소 시스템의 '공정성'을 묻는 글을 보고 든 생각입니다. 

박현안 님께서는 새로운 유입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배려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근거는 "양질의 내용임에도 좋아요 수"가 현저히 적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박현안님이 생각하는 '공정'은 우선 '양질의 내용을 갖춘 글이 그에 걸맞는 좋아요 수'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정을 방해하는 시스템으로서 '구독' 시스템을 예로 들었습니다. 구독 시스템이 먼저 얼룩소에 진입한 사람들을 유리하게 만들기 때문인 것이죠.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양질'의 글을 판별하는 기준자체가 모호합니다. 때문에 박현안 님께서도 "제가 말하는 양질이란, 단지 분석적이고 데이터를 많이 활용한 글은 아닙니다. 개인적인 글이라 할지라도 진솔하게 쓰였다면 양질의 글이라고 할 수 있겠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양질'에 대한 박현안님의 평가만을 받아들일 수는 없겠죠? 얼룩커 각자가 '양질의 글'에 대해 서로 다른 판단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쟁점은 정의론의 용어로 표현하면 '정의'(Justice)에 대한 서로 다른 '정의'(Definition)의 문제입니다. 즉 무엇이 '정의'고, 무엇이 '양질'이냐 라는 거죠.

게다가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박현안님 께서는 "어떤 사람은 각종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또 어떤 사람은 꺼내기 어려웠던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냄으로써 간신히 만원보상을 받는다면, 어떤 사람은 겨우 몇 줄 간단히 끼적였는데도 만원보상을 받습니다. 같은 금액을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민망함이 수반"된다고 하셨습니다. 

 즉, 공정에 대한 두번째 문제로, 투여한 '노동'과 '보상'의 관계가 제기됩니다. 누군가가 많은 노력을 들여 쓴 글이 아니라, 덜 노력을 들인 글이 보상을 받는다면 정의로운 것일까요? 혹은 같은 보상을 받는 것은 정의로운 것일까요? (노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는 일단 재껴둔다 하더라도) 이 쟁점이 바로 정의론에서의 '분배'의 문제입니다. 

  얼룩소의 시스템은 얼룩커끼리 서로가 서로를 평가하는 방식의 시스템을 갖추었습니다. 그러므로 '양질의 글'을 정의하는 것은 '얼룩커 여러분들'의 몫이 됩니다. 그러나 좋아요가 더 많다고 해서, 더 많은 보상을 제공하지도 않죠. 즉 분배의 문제에 대해서는 좋아요 3개라는 '최소의 허들'을 설치하고, 그 이상의 좋아요를 확보한 글 중 100개를 매일 선정하여 동등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에디터 픽'이나 '데이터 룩'등의 보상 시스템도 있죠. (또한 부정의한 행동을 제지하기 위한 행동강령과 운영정책 등도 있습니다.)

  얼룩소와 다른 보상시스템을 채택한 Steemit(스팀잇)이라는 서비스는 더 많은 보팅(좋아요와 유사)을 받은 글에 그에 비례하는 보상이 주어집니다. 이 글은 분배의 문제에서 비례적 보상을 선택한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얼룩소의 동등한 보상 시스템과 스팀잇의 비례적 보상 시스템 중 어느 한쪽이 더 정의롭다고 손쉽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정의의 아이디어>의 저자 아마르티아 센은 이야기를 통해 정의론의 딜레마를 보여줍니다. 세 아이가 있고, 피리는 단 하나가 있습니다. 한 아이는 세 아이 가운데 오로지 자신만이 유일하게 피리를 불 수 있으므로, 자신에게 피리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죠?) 다른 아이는 세 아이 가운데 오로지 자신만이 가난해서 장난감이 없다고 외치며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합니다. 나머지 두 아이는 유복하여 다른 장난감이 많습니다. (이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마지막 아이는 그 피리는 자신이 여러 달에 걸쳐 부지런히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아이의 말도 타당하죠.)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내리실 건가요?
 
  위 세가지 입장은 각각 공리주의자(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경제평등주의자(경제적 동등성), 자유의지론자(노동의 결실)를 대변합니다. 그러나 위 세가지 중 단 한가지 만이 '공정'하다고,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마르티아 센은 기존에 많은 이론들(정의론의 대표자인 롤즈를 필두로)이 '공정성'의 함정에 빠져, 단 '하나의 완벽한 정의론'을 도출하려 시도했다고 말합니다.

  아마르티아 센은 이를 비판하며, 이론적 놀음으로서의 '공정한 룰과 게임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현실적 부정의를 제거하는 방식의 실천적 정의론'을 제안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너무 어렵지만, '부정의란 무엇인가'에 우리는 더 쉽게 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을 바꿈으로써, 우리는 부정의를 캐묻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지를 논의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다시 얼룩소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얼룩소는 완벽히 정의롭지 않습니다. 어떤 공론장도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공론장의 환상'입니다. 뿐만아니라, 공론장은 그저 방목하고 방관한다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규칙도 룰도 없는 공유지는 파괴되고, 고갈됩니다. 이것이 '공유지의 비극'입니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좋은 공론장을 위한 고민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운영자 또는 상위의 권력자가 미리 정해둔 규칙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하는 규칙이겠죠. 그렇게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문제를 찾아내고, 해결하면서 '더 나은 공론장'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룰과 공론장을 만드는게 아니라요.

  아마르티아 센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정의의 아이디어'로서, ‘역량’이란 개념을 제안합니다. 즉 단순히 기존의 능력, 기득권에 따른 분배(능력주의)나, 공정한 게임 규칙(공정성 담론)의 틀에 논의가 한정되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참가자 개인의 이해관계(개인주의-조합주의)수준을 넘어서, 모든(+참여자들이 배제되지 않도록, 접근성 및 확대 가능성을 함께) 참여자들의 역량을 향상 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역량 기반 접근은 단순히 공평한 몇번의 기회(기회의 평등)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며, 또한 결과를 동등하게 하자는 (결과의 평등) 논의 이상을 요구합니다. 역량기반 접근은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역량과 자유를 향상시킬 수 있도록, 계속해서 사회 인프라를 제공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단순히 어떤 개인이 1만원이 받기 쉬운지 어려운지 문제를 넘어서, 이 시스템과 함께 얼룩커들이 성장할 수 있는지, 또 이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공공의 이익과 공론장의 형태는 어떨지 함께 다루며 ‘정의'의 문제를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 얼룩소의 공정성에 대한 논의들이 제게는 마치 세 아이의 논쟁처럼 보입니다. 셋 다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으며, 고려해야 하는 '정의'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셋 중 누군가가 옳은지를 선택하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세 아이가 피리 하나를 두고 경합해야 하는 상황 자체를 벗어나야 합니다. 한 아이만 피리를 불 수 있다면, 다른 두 아이에게 피리를 부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장난감이 없는 아이는 더 많은 장난감을 가질 기회를, 노동을 수행한 아이에게는 정당한 노동의 보상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얼룩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성장하고, 역량을 키워나갈 수 있는 얼룩소를 얼룩커 여러분들과 함께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