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에모] 화양연화(花樣年華)

살구꽃
살구꽃 · 장면의 말들에 귀를 모아봅니다.
2023/03/30

드디어 일을 저질렀다. 마음만 간절했던 00오일파스텔 한 세트와 오일파스텔전용 픽사티브(정착액)를 주문한 것이다. 둘 다 수입상품이라 큰마음을 먹어야했다. 저지른 일에 이토록 설레다니... 

   
하루가 멀다 하고 한두 장씩 그린 드로잉과 오일파스텔 그림 수십 장이 쌓였다. 파일에 넣기 전에 퇴색을 더디게 하고 색이 묻거나 번짐을 막아줘야 했다. 비교적 픽사티브가 그런 역할을 잘 해준다. 자외선 강한 봄 외출에 선크림 바르듯 보호막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픽사티브를 주문하기 전, 동네 문구점에서 150미리 용량을 산 게 있었다. 목탄이나 콘테로 그린 그림이 아래위로 겹치면서 가루가 떨어지고 자기들끼리 서로 번졌다.  마감처리가 필요했다. 날씨가 맑고 바람이 적당한 날, 신문지를 잔뜩 들고 옥상에 올라갔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그림들을 올렸다. 흑백과 칼라가 뒤섞였다. 손바닥크기부터 일반노트, 8절 스케치북만한 크기들까지 들쭉날쭉한 그림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림을 그린 종이도 종류와 무게가 다 달랐다. 일반도화지와 엠보싱수채화지, 미끈하고 투박한 브리스톨지, 검은하드보드지, 또 주변의 것들을 활용한 탁상달력 빳빳한 겉표지, 누런 소포지 등이었다.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한 걸음 물러서서 픽사티브의 분무식 누름부분을 눌렀다. 치이이이이, 치이이이...위에서 아래, 왼쪽에서 오른쪽을 교차하며 뿌려지는 액체가 안개처럼 그림 위에 촉촉이 내려앉았다. 

그동안 그렸던 그림을 펼쳐서 한꺼번에 바라보니 내가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오일파스텔을 알기 전, 연필심의 진함에 따라 강약을 손에 익히며 그려본 나무와 돌, 바위나 구름, 의자, 항아리, 건물 등이 있는 풍경과 정물들은 흑백세계에 머물렀다. 그 안에 무수히 들어간 움직임, 어떤 형태로 드러나기 이전에 스며든 헛손질과 대상을 뚫어져라 바라본 시선, 그 정성들이 무채색의 파노라마로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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