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마리아, 지중해 - 반 고흐가 남쪽으로 간 까닭은 (완결)
2023/04/26
4장
반 고흐 그림 속의 빈센트
갈대로 맺어진 동지애
아를의 남쪽에는 카마르그라는 습지가 있고 이 주변으로는 지천에 갈대가 자란다. 보통 ‘카마르그 갈대’라 불리는 이 골풀을 베어서 말리고 두드리면 제법 부드러워져 이걸 가로 세로로 꼬고 엮어 모자나 가방, 의자 시트 등 일상용 소품을 만들 수 있다. '미레이오'의 남자 주인공 빈센트는 그런 걸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런 일을 우리말로는 ‘짚을 삼는다’고 하는데 누구나 금방 배울 수 있는 기술이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잘것없는 일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나 전통 문학 속에서 별다른 재주가 없는 사람, 특히 몰락한 양반이 짚신을 엮어 파는 이야기는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시시한 남자 닉 보톰의 직업도 짚을 짜는 사람이다. 영국에선 짚으로 주로 의자 시트를 만들었는데 그 직업을 지칭해 궁둥이가 닿는 부분을 만드는 사람이란 의미로 '보토머'라 불렀다. 닉 보톰은 거기서 유래한 이름이다.
카마르그 갈대는 시 속의 농민 빈센트와 화가 빈센트가 공유하는 또 다른 공통점이었다. 반 고흐가 아를 시절에 그린 소묘를 보면 붓도 아니고 펜도 아닌 마치 붓과 먹으로 끊어 그린 듯한 작품들이 있다. 이 작품은 바로 이 갈대로 만든 펜으로 그려졌다. 길가에 아무렇게나 자라는 갈대를 뽑아 주머니칼로 사선으로 날카롭게 자르면 훌륭한 펜이 된다. 속이 비어 있으니 잉크를 머금을 수 있고 다소 굵은 느낌이 있어 당시 유행하던 평붓의 느낌으로 스케치할 수 있었다. 두 빈센트는 모두 초라했고 둘 다 갈대를 이용해 뭔가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둘 다 사랑에 실패했다.
남다른 광고를 하기 위해 미술사를 전공했다. 남다른 미술사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일반 역사를 배웠다. 젊은 척하는 광고 카피를 쓰고 늙은 척하는 평론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