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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받습니다] 월급사실주의 작가들이 필요한 이유, 소설가 장강명이 답한다!
2023/10/11
안녕하세요. 소설 쓰는 장강명입니다.
<얼룩소>에 글을 남기는 건 처음이네요. 반갑습니다.
간혹 책과 관련된 행사, 북 토크, 독자와의 만남에 가면 “이런 시대에 문학을 왜 읽어야 하느냐?” “문학의 힘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같은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문학계에 한 발 걸친 사람이라면 요즘 다들 비슷한 질문을 받기도 하죠. 문학의 힘이 잘 보이지 않으니 나오는 질문입니다. 돈의 힘이 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2022년 비정규직 노동자는 815만 명이 넘었습니다. 이제 한국인 절반가량은 본인이 비정규직이거나 가족이 비정규직으로, 이것은 2020년대 한국 사회 불평등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저는 2000년대 들어 그렇게 비정규직이 늘어나던 시기, 한국 노동시장이 둘로 쪼개지던 때에, 그 실태나 증가세를 사실적으로 알리고 비판한 작품으로 한국소설보다는 드라마나 웹툰이 먼저 떠오릅니다. 백수나 시간강사가 등장하는 소설들을 놓고 노동시장 이원화를 지적한 거라고 주장하고픈 마음은 안 듭니다.
황석영 작가는 2010년대 중반 몇몇 언론 인터뷰에서 《미생》과 《송곳》을 높이 평가하며 “문학이 그런 서사를 다 놓치고 있다니!” “한국문학의 위기는 한국문학 스스로가 현실에서 멀어지면서 자초한 게 아닌가” “한국 젊은 소설가들이 바로 이런 당대의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미생》과 《송곳》 이전에 비정규직 문제를 다뤄 큰 호응을 얻은 드라마 《직장의 신》이 일본 드라마의 리메이크였다는 사실에 이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듭니다. 한국 소설 중에는 원작으로 삼을 마땅한 작품이 없었던 걸까요? 과연 한국 소설가들이 탄광의 카나리아고 잠수함의 토끼 같은 존재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배윤성 님, 안녕하세요? 『당선, 합격, 계급』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품이 많이 들어간 책인데... 취재하고 쓰는 데 꼬박 2년이 걸렸습니다. 가성비가 높은 작업은 아니었지만 혼자서(어쩌면 혼자서만) 보람을 품고 있어요. 저한테는 논픽션 단행본을 쓰는 훈련도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애정이 있는 분야이니 논픽션을 더 쓰기는 할 텐데 많이 쓰지는 못할 거 같습니다. 픽션에 비해 확실히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작업이라서요.
@jojoqqq22 님, 안녕하세요. 답변이 늦어져 죄송합니다.
1. 네, 있었습니다. 한 분도 아니고 여러 분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 분들도 사정과 의견이 있었고, 아쉽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월급사실주의 단행본 시리즈가 이어져 꼭 모시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2. 굉장히 개인주의자이고, 사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합니다. 금세 피곤해지기도 하고, 많은 경우 방향 없는 대화 자체를 잘 즐기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사람보다 글자가 더 좋네요. 어떤 잔혹한 사건들이나 군중심리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보면서 인간혐오를 느끼기도 합니다. 인간 전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고, 제가 아끼고 사랑하는 지인들도 있는데 그 폭이 넓지 않은 거 같아요.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대해서는 연민도 있고 책임도 느낍니다. 가엾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믐 인스타그램 해킹...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해결을 못하고 있습니다. ㅠ.ㅠ
@qpzl1004 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소통하니 저도 신기하고 좋습니다. 답변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저출생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전문가도 아니고, 저 역시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사람이라 말씀드리기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습니다. 최재천 교수님 말씀에 매우 동감하고, 거기에 더해 말씀하신 대로 부모가 되는 일보다 자아실현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 가치관 변화도 분명히 영향이 있었겠지요.
저는 약간 엉뚱한 생각도 해보는데요, 기본적으로 한국에, 또 지구에 사람이 너무 많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 정도 면적의 땅에 이렇게 많은 인구가 있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었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자연환경에 큰 부담을 줬던 것 아닐까.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경쟁도 극심했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한국이든 지구든 인구가 줄어드는 게 오히려 옳은 방향 아닐까. 보다 적은 사람이 보다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걸 목표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산업 구조, 경제 구조가 인구 구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급격한 인구 구조 변화가 사회에 큰 충격이 될 거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 충격이 고통스럽지 않게 잘 대응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보고요. 하지만 그 해법이 출생을 늘리는 것이라는 의견에는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너무 과격한 의견일까요.
@장강명 작가님 소설의 독보적인 흡입력은 노력이 아닌 재능이겠지, 소설을 쓰는 데 타고난 재능이 있어 보다 쉬운 선택이었겠거니 라고 넘겨짚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믿는 일'이라는 말이 마음을 울리네요.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들 틈에서 창작의 시간을 벌겠다는 선택을 하신 과정을 공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서없는 질문에 이런 귀한 답변을 해주시는, 당신의 선택에 당당한 자랑스러운 작가 선배가 계셔서 좋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언젠가는 저도 장가명 소설가님을 소설가 선배라고 부를 수 있도록, 쉽게 쓰인 글들로 빠르게 생계유지 할만큼 돈을 벌고싶다는 욕심을 줄이고 더 노력해야겠습니다.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며니 님, 응원 감사합니다. 조금 묘한 일인데요, 소설가로 벌어들이는 수입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냥 프리랜서, 작가 혹은 글쟁이가 아니라 소설가라고 저 자신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어요.
들이는 비용(시간) 대비 거두는 수익을 따져보면 저는 소설을 쓰지 않아야 하거든요. 강연이나 방송 출연, 판권 수익이 소설 인세보다 훨씬 높습니다. 제가 좋은 매체들에 칼럼을 실었기 때문에 칼럼 원고 고료가 소설 원고 고료보다 높고, 판매량은 비슷한데 에세이가 훨씬 쓰기 쉬우므로 에세이에 비해서도 소설은 가성비가 떨어집니다. 판권 수익의 경우 영화나 드라마 제작사에 합류하면 단행본을 내지 않아도 얻을 수 있고요.
그런데 제가 정말 원하는 것은 소설 단행본이더라고요. 위의 제안들을 거부하면서 제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알게 됐고, 그러면서 스스로를 ‘소설가’라고 부르게 되었어요. 이상하지요. 이런 경험에 감사하기도 하고, 내심 자랑스럽기도 합니다. 자신이 믿는 일,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정말 감사한 상황이더라고요.
@strawhat 님, 응원 감사합니다. 의도는 거창했는데 제대로 성과를 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벌이는 일들이 대체로 그렇네요. 열심히 쓰겠습니다!
(3/3) 저는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생각을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그려내는 도구가 만화든, 노래든, 영화든 크게 상관없을 것 같은데 꼭 소설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지 물으셨지요. 같은 질문을 만화나 노래, 영화에도 던질 수 있겠지요. 그러면 결국 같은 답이 나옵니다. 현실을 그려내는 도구가 만화여야 할 이유도 없고 영화여야 할 이유도 없을 거 같습니다. 소설이어야 할 이유도 없고요. 하지만 ‘무엇무엇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문장은 그 무엇무엇에 대해 실제로는 별로 말하는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극단적으로는 세상이 존재해야 할 이유도, 제가 살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탈출구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삶을 선택한 나는 이렇게 펼쳐진 가능성으로 무엇을 하려는가’가 진짜 집중해야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2/3)
한국의 성차별에 대해 기사나 다큐멘터리로 다룰 수 있는데 페미니즘 소설이 있어야 할 이유는 뭘까요. 저는 현실이라는 게 팩트의 총합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재구성하고 각 등장인물들에 대해 보상 혹은 처벌을 내리는 장소가 실제로 세상에 있습니다. 법정입니다. 그런데 법정에서도 겉으로 드러난 사실 이상을 다룹니다. 가해자의 의도를 따지기도 하고, 피해자의 정신적 고통을 묻기도 합니다. 그렇게 사실의 표면 아래로, 인물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기에 현실을 재구성하는데 소설의 특별한 장점이 생기지 않나 합니다. 그런 접근법이 때로는 보다 정확하게 현실을 보여주기도 하며, 다른 사람의 삶에 동화되는 힘도 거기서 나오는 것 아닌가 합니다.
‘읽고 나서의 갑갑한 기분’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도 이른바 ‘자연주의 소설’이라고 하는 작품들을 접할 때 그런 괴로운 기분을 맛봅니다. 하지만 제 경우에는, 현실을 재구성할 때 저의 성실성을 계속 따져묻게 됩니다.
@조율 님, 안녕하세요. 장강명입니다. 죄송한 기분으로 답글을 답니다. 답이 길어져 세 부분으로 나눴습니다. 얼룩소에 올리신 글도 잘 읽었습니다.
(1/3)
몇몇 질문들은 제가 아래 적은 글 몇 개에서 답이 좀 되지 않았나 합니다. 그 외에 덧붙일 수 있는 이야기들을 적어보겠습니다. 쓰다 보니 반론의 형태가 되었지만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김형수 작가님의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에 문학의 효용을 설명하는 간단한 일화가 나옵니다. 김 작가님이 어릴 때 버스 안내양이 쓴 『어느 안내양의 수기』라는 책을 읽고 펑펑 울었는데 이후에 버스 안에서 안내양을 배려하면서 행동하고 손님과 안내양이 싸우면 늘 안내양의 편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김 작가님은 그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누구나 안내양에게 동화된다고, 그것을 문학의 사회적 작용이라고 하면 안 되느냐고 썼습니다.
월급사실주의의 목표는 현실을 핍진하게 그려내고, 그 이상의 문학적 성취도 달성한다는 것이기에 전자에만 그친 것 같다고 읽으셨다면 그것은 저희의 실패입니다. 하지만 저는 전자 역시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 동화되게 만든다는 면에서는 소설이 다큐보다 낫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아래에도 적었지만 다큐멘터리가 한국에서 그리 활발하게 제작되는 것도 아닙니다.
@nonsulroad 님, 감사합니다.
1. 댓글부대들이 있고, 댓글부대를 실행시키는 기관이나 세력이 있는 건 분명한 거 같습니다. 한국만의 일이 아닌 것 같고요. 그런데 제가 그 댓글부대들이 실제로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배후 세력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상상에 의존해서 쓴 부분이 독자 분들이 짐작하시는 것보다 많습니다.
2. 그에 대한 지적이 업계에서도 나오는데, 수면 위에서 활자 형태로 거론된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남자 작가들이나 출판 관계자들끼리 모이면 이야기합니다. 치졸한 불만들을 제외하고 의미 있는 지적들을 추려보면 이러합니다. △설교조, 계몽조인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비판을 페미니즘 전체에 반대하는 반동 행위로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 아닌가, 비판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 아닌가 △성평등을 말한다기보다는 남성혐오에 가까운 작품들이 있지 않은가 △일관적인 잣대 없이 작품이 아닌 작가 비판을 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남성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거부감을 사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등.
어떤 인간도 타고난 성과 성 정체성을 이유로 억압받지 말아야 한다고 믿으며, 한국 사회에 여전히 성차별이 만연하고 문학이 이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느끼기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저 역시 조심스럽습니다. 제가 한국 문학장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지 않고, 또 저 역시 40대 남성으로서 가부장제의 수혜자임을 부정할 수 없어 더 그렇습니다. 다만 저는 고통의 주체는 관념이 아닌 개인이며, 제 글은 거기에서 물러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전부터 해왔고 최근에는 그 생각이 더 굳어졌습니다.
3. 저도 궁금합니다. 냉정하게 볼 때 그들만의 리그, 고급 취미가 될 가능성을 부인할 수도 없다고 보고요. 다만 아래 사사키 아타루 이야기를 적기도 했는데, 그와 별개로 ‘(순)문학은 이제 죽었다’는 식의 주장은 냉철한 시장 분석조차 못 되는 우스운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최악의 경우에도 지금의 클래식, 혹은 국악 정도의 위상이나 시장 규모는 유지할 거 같아요. 적어도 두 세대 정도는요. 게다가 클래식이나 국악과 달리 IP 비즈니스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돈이 있고, 또 창작 비용도 거의 들지 않습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제가 보기에는 지금 웹소설이 아닌 문학출판업의 미래도 신문업의 미래보다는 밝습니다.
더 시간이 흘러 지금의 ‘문학 소설’이라는 형태가 향가나 가사, 서사시처럼 대중적인 생명을 다하는 미래도 오지 말라는 법은 없을 거 같습니다. 저한테는 지금의 소설 문학이 너무나 크고 강렬하게 다가와서 잘 상상이 안 가는 미래이지만, 제 소망대로 세상이 흘러가지는 않겠지요. 어느 쪽이건 그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고, 저는 저의 생계를 잘 살피면서 제가 쓰고 싶은 소설을 쓰려 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댓글부대>야말로 21세기 한국 최고의 리얼리즘 문학이다! 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천현우입니다. 저도 노동 소설을 집필 중인데요.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질문입니다. <산 자들>에 이어서 또 노동인데요. 노동, 좀 더 풀어서 ‘먹고 사는 문제’에 언제부터 꽂히신 걸까요? 인터뷰들을 검색해봐도 ‘집필목적’은 뚜렷한데 ‘집필동기’는 잘 안 보였습니다.
그리고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규칙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 5년 이내의 현장, 취재를 토대로 한 사실적인 작성’인데요. 이 규칙을 다 지킨다면, 결과물이 왜 꼭 소설의 형식이어야만 할까요? 언뜻 봤을 땐 좋은 소설의 요건보단 좋은 기사의 요건처럼 보이기도 하거든요.
여기에 달아, 저는 ‘노동 문학’의 저변이 아주 얕아졌다고 생각합니다. 명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본문에 언급하신 황석영 작가님의 <객지> 같은 근사한 노동 문학 작품을 보기 정말 어려워졌죠. 세상이 다층으로 쪼개진 이유도 있을 테고, 문학 자체의 퇴조도 이유일 듯한데요. 작가님이 생각하시는 ‘노동 문학이 정체한 원인’이 궁금합니다.
(2/4)
제가 자주 겪는 일인데, 어떤 분들은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는 일을 그 작동 방식을 옹호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예를 들어 소설에서 어떤 직원이 해고되거나 팀원 전원이 대기 발령을 당하거나 대규모 구조조정이 발생할 때 저는 그걸 불가해한 재난처럼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사용자는 왜 그런 일을 했는가를 현실적으로 그렸지요. 그랬더니 그걸 ‘사용자를 옹호한다’고 받아들이는 일부 독자들이 있더군요. 문단 어르신 중에도 있고, 젊은 평론가 중에도 있고요. 제 입장은 ‘사용자는 왜 그런 일을 하는지를 알아야 제대로 시스템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를 그냥 악마화해버리는 게 정신건강에도, 인기를 모으는 데에도 더 좋을 것 같습니다만.
특히 『산 자들』을 쓰고 나서 위와 같은 일들을 겪은 뒤 노동 현장을 보는 한국 문학계의 시선이 낡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업인은 악, 노동자는 선 같은 단순한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영세 자영업자 문제가 잘 거론되지 않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고요. 이분법으로는 절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시스템이 복잡해졌는데 그걸 잘 담아내지조차 못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 월급사실주의 동인을 모으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고, 일단 발품을 파는 현장밀착형 소설들이 이곳저곳에서 나오게 해야 하지 않을까, 뭐 착상은 그렇게 거창했습니다.
(4/4)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시스템이라는 주제를 오래 고찰하다 보면 윤리의 문제에 이르게 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몸집이 큰 시스템은 반드시 윤리를 필요로 합니다. 시스템이 어느 규모에 이르면 구성원 전부에게 이익을 약속하면서 돌아갈 수 없거든요.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불리함을 감수하고 시스템의 작동 방식에 따르게 만들어야 합니다. 때로는 그 작동 방식에서 벗어난 구성원을 처벌하기도 하고요. 즉 큰 시스템들은 자신들의 작동 방식을 떠받칠 윤리를 채택해야 하고, 그럴 윤리가 없다면 발명해야 합니다. 윤리를 바라보는 한 태도이겠지요.
그런 관점에서 근대 이전 사회를 종교가 떠받쳤고, 현대 사회를 계몽사상이 떠받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에 나오는 “인간은 자살하지 않고 살기 위해 신을 생각해낸 것이다. 이때까지의 세계사는 바로 이것에 불과한 거야.”라는 대사에 20년째 꽂혀 있어요. 그 대사도 이런 맥락에서 소화합니다. 『표백』도 『재수사』도 저 대사에서 시작했고 아마 같은 주제로 장편소설을 최소한 한 편은 더 쓸 거 같습니다.
장강명 선생님의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정성어린 질문과 답변을 읽는 것이 참 즐겁습니다:)
이런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되어 반갑고 감사합니다.
1. '플랫폼과 인공지능이 노동시장을 흔든다'고 하셨는데요.
데이터 라벨러나, 거대 IT 플랫폼의 생리를 잘 알고 있고 내부 운영정책에 관여하는 프로젝트 관리자, 인공지능을 개발하면서 사람의 일을 줄이거나, 없애거나, 자신의 일마저 줄이고 있는 머신러닝 개발자 등의 직업 노동자에 대해서도 다룰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새로운 재난의 경계선에서 변화를 보고 느끼고 있는 직군들인 것 같은데, 뭐라 표현하기 어렵지만... 누군가 꼭 다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2. 대다수의 사람들이 노동과 직업의 관점에서 잉여인력이 되는 사회가 온다면, 인간은 자살하지 않고 살기 위해 무엇을 생각해내게 될까요.
혹시 최근의 현상들에서 그 단초를 느낄 때가 있으신지요. 다소 무거운 질문인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이번 질문과 답변들을 통해 작가님의 주제의식을 조금 더 명확히 알게 되어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원진 님, 질문 감사합니다. 그런데 기본적인 답은 @kse4783 님께 드린 답으로 갈음해도 괜찮을까요? 조금 보충하자면 신문기자로 10년 넘게 일하면서 저널리즘 글쓰기를 무척 사랑하는 한편, 그 한계도 깊이 느꼈습니다. ‘사실적인 글’과 ‘사실을 적은 글’은 다릅니다. 저는 기자로서 후자를 쓰라고 배웠고, 저 역시 후배 기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한 말은 쓸 수 있지만(사실), 그 사람이 말하지 않은 내면은 쓸 수 없습니다(진실일 수는 있지만 사실은 아닌 것). 그리고 자기 내면을 요령 있게 말로 잘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첨언하자면 좋은 스토리텔링 기사는 매우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2010년대 들어 언론사들이 본격적으로 시도한 기사 방식인데, 도입 배경은 좀 씁쓸합니다. 매체 환경이 인터넷 위주로 바뀌고 기사 베끼기가 쉬워지면서 스트레이트 단독 기사 경쟁이 무의미해졌기 때문에 일종의 자구책으로 도입한 측면이 강합니다. 스토리텔링 기사는 기존의 역피라미드형 기사에 비해 취재에 품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는데 성과는 대체로 미약합니다. 내부에서 조회수를 체크해보면 연예인 사생활 잡담 기사가 늘 상위권이고, 긴 기사는 사람들이 제대로 읽지도 않습니다(‘누가 요약 좀’이라고 댓글이 달리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보기에는 몇몇 언론들이 스토리텔링 보도를 잠시 시도하다 포기한 듯한 인상입니다. 제가 잘 아는 분야는 아니지만, 다큐멘터리 역시 극영화나 드라마에 비해 시장 수요가 적고, 그만큼 제작 여건도 열악한 걸로 전해 들었습니다.
여기 올라온 댓글도 훌륭하지만, 작가님이 달아주시는 대댓글도 좋아요. 굉장히 자세하게 깊이 잘 써주셔서! 감탄합니다. 잘 보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글도 훌륭하고!
북토크를 온라인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3/4)
여기서부터는 STS SF 이야기입니다. 저는 과학기술이 사회 시스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데, 최근에는 그 영향력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예컨대 저는 21세기 선진국에서 어떤 정치인보다 더 소셜미디어가 정치적 영향력이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증강 현실이나 데이터 예측분석 같은 기술도 사회 시스템을 밑바닥에서부터 흔들어놓지 않을까, 거기에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심들이 STS SF 작업으로 이어졌습니다(착상은 늘 거창합니다).
그런 작품 안에서는 근미래에 등장할 기술들이 사회 시스템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그려보려 했어요. 예컨대 증강현실이 극단적인 사회 파편화를 불러오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지금 쓰는 소설에서는 자율주행차를 소재로 인공지능이 노동시장에 줄 충격을 그려보려 하고 있는데, 실제로 한 세대 안에 현실로 다가올 문제일 겁니다. 반면 시간여행이나 초광속 이동, 초능력 같은 소재에는 그 정도 의무감 어린 관심은 들지 않더라고요. 당장 닥칠 것 같지도 않고, 제 상상력의 범위 밖에 있는 것 같기도 해서요.
@anthem99 님, 질문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도 답을 잘 모르겠네요. 이렇다 할 통계도 없고, 제가 영상업계 전문가도 아니고, 취재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말 같아 보이는 말’만 할 수 있을 따름인데요.
일단 최근 한국 영화나 드라마 원작으로 소설보다 웹툰이 더 많은지 자체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 같기도 한데, 누가 제대로 세어본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종이책으로 출간되는 소설 신작과 웹툰 플랫폼에 올라오는 웹툰 신작의 규모도 다를 것 같고, 과거에 비해서 수치가 늘었다거나 줄었다거나 하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 같아요. 종편과 OTT가 등장하고 한국 영상산업 규모가 커지면서 기본적으로 국산 영상물이 많아졌고, 소설 원작 영상과 웹툰 원작 영상이 양쪽 다 늘었는데 후자가 더 증가한 것 아닐까 하고 막연히 상상만 하고 있습니다. 판권 판매 단계에서도 그러한지, 아니면 판권 구입 이후 제작 단계에서 비율이 달라지는지 같은 사항도 문득 궁금하네요.
그냥 최대한 심심하게 생각해보자면 영상물 제작에는 비용이 들고, 그러다 보니 검증된 원작이 더 투자를 받기 쉽고, 상업적으로 성공한 소설보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웹툰이 많으니 후자가 제작자들에게 더 인기가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웹툰이 상업적으로 성공한 소설보다 많다는 것이 곧 웹툰이 소설보다 더 한국인의 욕망을 잘 건드렸다는 의미이고, 요즘 한국 웹툰이 요즘 한국 소설보다 더 한국 현실을 잘 반영했다는 의미 아니냐, 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비약인 거 같습니다. 콘텐츠를 소비하는 플랫폼부터 다르니까요.
이상 전제부터 결론까지 가정에 가정을 거듭한 ‘말 같아 보이는 말’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의 <댓글부대>, <우리의 소원은 전쟁>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번 앤솔로지도 꼭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작업 방식이 궁금합니다.
노동 현장을 다큐가 아닌 문학으로 남기는 것은 작가마다 풀어내는 관점과 서사 방식도 중요할 텐데 기획하실 때 이런 부분도 동인분들끼리 모여 함께 협의를 하시나요? 아니면 각자 분야만 정리하고 소설은 철저히 작가에게 맡기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원고가 정리되었을 때, 동인분들께서 함께 읽으며 합평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피드백을 나누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이미 프로 작가님들이라 서로의 작품으로 의견을 나누기 쉽지는 않을 듯 한데, 동인으로 앤솔로지 작업을 한다면 또 필요한 부분일 거 같은데 실제 작업하실 때는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