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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환 시도가 곧 문제임을 인지하는 것

페미니즘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들어봤을 법한 질문. "왜 이퀄리즘(equalism)이라 하지 않고 페미니즘(feminism)이라 하는 거야? 그것 자체로 여성 우월주의 아니야? 진짜 '양성 평등'한 세상을 꿈꾼다면, 어차피 명칭일 뿐이니까 이퀄리즘이라고 해봐-" 에 대한 내가 내린 나름의 답은 바로 >치환 시도가 곧 문제이며 이것을 인지하는 것에 필요한 역치를 연구해야 한다<이다.
논지를 넓히기 위해 성 차별의 양상과 유사한 방향으로 흘렀던 인종 차별 사례를 다뤄보자. 조지 플로이드는 지난 해 5월, 8분 46초간 목이 눌려 사망했다. 그를 죽인 건 다름아닌 미국 주 경찰. 진압 과정에서 인종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은 통계적으로 그리고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무수히 증명됐으며 이후 조지 플로이드 사건은 인종 차별을 대표적으로 상징하게 된다. 당시 조지 플로이드를 기리는 # black_lives_matter 해쉬태그가 SNS를 휩쓸었다.
그리고 함께 등장한 해쉬태그가 바로 # all_lives_matter. 놀라운 점은 뉴욕 타임스가 # all_lives_matter 해쉬태그를 'Such a Perilous (아주 위험한) Phrase'라 칭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즈 기사


아니, 흑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목숨은 소중하다는데 이게 위험하다니, 뉴욕 타임스가 드디어 미친 걸까? 내면을 제대로 살피기 위해선 # all_lives_matter의 탄생 배경을 알아야 한다.
단적으로 말해 # all_lives_matter은 # black_lives_matter을 비꼬기 위해 탄생한, '명칭 치환 시도'이다. 미국 전 대통령인 트럼프를 포함한 공화당원들이 자주 사용하기도 했으며 흑인에게 집중된 관심을 분할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다. 그래서 뉴욕 타임스는 "# all_lives_matter를 사용하는 일부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를 경시하거나/ 카운터 슬로건으로 해쉬태그를 사용하거나/ 누군가 불쾌할 것이라는 것을 외견상 모르는 척하고 있다"며 # all_lives_matter을 -아주 위험하다(perilous)- 라고 비판한 것이다.
이제 다시 페미니즘(feminism)으로 돌아오자. 맞다, 페미니즘을 지향한다면 양성 평등한 세상을 꿈꿔야 하며 여성 혐오에 대한 분노가 남성에 대한 분노로 이행되지 않을 것을 지극히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페미니즘과 안티 페미니즘 모두에게 존재하는 일부의 극단적 반발 등을 근거로 '페미니즘(feminism)을 이퀄리즘(equalism)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은 # black_lives_matter 대신 # all_lives_matter 을 사용해 인종차별을 가리자는 시도와 다름 없다. 한나 아렌트는 말했다. "어떤 사람이 유대인이라서 공격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유대인으로서 자신을 옹호해야 한다. 독일인으로서가 아니라, 세계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인권의 지지자로서가 아니라, 그 외의 그 무엇으로서가 아니라." 유색인종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백인의 인권을 왜 주장하지 않느냐고 누군가 묻노라면 이제 우리는 그 누군가가 사상 검증 시도를 하고 있음이 명확히 보인다.
치환 시도가 곧 문제임을 인지하기 위한 역치는- 바로 지금 이미 존재한다. 여성 인권 한 마디 올려도 (지극히 neutral한 내용을, 그것도 주변 남성들에게 확인 받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차단되고 악플이 달리는 지금, 아주 작은 논쟁거리도 첨예하게 변질되는 지금, 주변 사람에게 "너 페미니즘 해?" 소리 한 마디 듣는게 당혹스러운 지금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역사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사고체계, 권력의 담론, 이데올로기적 허구- 정신에 의해 만들어진 속박-이 놀라울 정도로 쉽게 만들어지고, 응용되며, 보호된다는 것"을 늘 인지하고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놀랍게도 우리가 믿는 거의 대다수의 것들이 실은 주변 이들과 허구의 세계인 온라인에서 양산되는 루머들에서 시작되었다. 루머가 자체 분열 및 증가한다는 사실 자체는 놀랍지 않으나 '우리는 실제로 그것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가치 체계를 습득한다'. 우생학에 대한 진지한 반박을 존 스튜어트 밀이 <여성의 종속>을 통해 1869년 이미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성과 남성성은 현재도 분류되며 결과론적으로 21세기에 리더인 여성들은 '남성성이 강한 여성'이라는 다소 웃긴 수식어를 매달게 됐다. 
모든 세세한 논쟁이 의미 없진 않다. 이 글 또한 '과연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여성에 대한 차별이 같은가?'라는 반박의 여지가 있다. 거기까지 글로 다루기는 힘드니 긴즈버그의 생을 다룬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에서 드러나는 논쟁을 확인해준다면 감사하겠다. 다만 질문의 출발점을 되돌아보자면 모두 한 방향을 가르킨다는 점에서 의심을 품어봤으면 한다. 안타까움이 피로감을 이긴 오늘 조금은 용기내서 글을 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