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에모2] 소문과 진실
2023/06/02
학교 그만둘 결심
밤꽃이 피는 계절, 중학교 2학년 여름이다. 장독대 틈사이로 봉숭아 봉오리도 도톰하다. 길가엔 명아주가 발길에 차이고 한낮의 풀죽어 늘어져 있는 모습이 꼭 심드렁한 내 모습을 닮았다. 나는 아버지가 자전거에 짬밥통을 싣고 오면 언덕 아랫길로 달려가 뒤를 밀어야 했다. 자전거 뒤 짐칸엔 내 키만한 둥근 드럼통은 내가 들어가면 딱 들어맞을 크기다. 아버지는 거기에 공군사관학교 식당에서 잔반으로 나오는 음식물을 매일 걷어왔다. 우리가 돼지를 키우기 시작한 건 ‘70년대 초반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봉천동에서 상도동으로 이사 오면서부터다. 아마도 나는 그때부터 머릿속을 헤집는 불만과 불안, 우울함이 복잡하게 얽혀 매일이 시큰둥했다.
밤꽃이 피는 계절, 중학교 2학년 여름이다. 장독대 틈사이로 봉숭아 봉오리도 도톰하다. 길가엔 명아주가 발길에 차이고 한낮의 풀죽어 늘어져 있는 모습이 꼭 심드렁한 내 모습을 닮았다. 나는 아버지가 자전거에 짬밥통을 싣고 오면 언덕 아랫길로 달려가 뒤를 밀어야 했다. 자전거 뒤 짐칸엔 내 키만한 둥근 드럼통은 내가 들어가면 딱 들어맞을 크기다. 아버지는 거기에 공군사관학교 식당에서 잔반으로 나오는 음식물을 매일 걷어왔다. 우리가 돼지를 키우기 시작한 건 ‘70년대 초반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봉천동에서 상도동으로 이사 오면서부터다. 아마도 나는 그때부터 머릿속을 헤집는 불만과 불안, 우울함이 복잡하게 얽혀 매일이 시큰둥했다.
학교는 상도동에서 만리동까지 버스를 타고 다녔다. 다른 친구들은 근처 중학교로 가는데 난 왜 그리 멀리 다녀야 하는지 그것도 불만스러웠다. 용산을 지나 서울역에서도 더 가는 통학은 멀미로 힘이 부쳤다. 등록금 때문에 종례시간마다 내 이름이 불리는 건 엄마한테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학교를 그만두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1학년 겨울에 엄마는 아버지가 입던 희끗희끗한 코트를 줄여 와세다아주머니한테 내 코트 수선을 맡겼다. 옷이 마무리되자 엄마가 아주머니한테 수고비 명목으로 돈을 드렸다. 등록금도 못 내는데 코트만 입으면 뭐해. 게다가 정해진 코트색깔은 감청색인데 진회색바탕에 흰색이 언뜻 섞인 코트라니. 교복위에 입은 수선된 코트를 보고 엄마는 ‘아유, 이제 따시겠다. 아주 딱 맞네.’하면서 흡족해했지만 나는 입자마자 벗어던지고 싶었다. 겨울마다 저 코트를 입고 학교에 다닐 생각만 하면 멀미가 나는 것처럼 머리가 어지럽고 배도 아팠다.
아버지 자전거가 올 때를 기다리며 나는 한낮의 해를 피해 그늘 한 구석에 앉아있었다. 흔해빠진 명아주이파리를 애꿎게 뜯다가 누군가 지나가는 바쁜 걸음이 내 앞에 멈췄다는 걸 느꼈다. 나는 동네 어른들 한데 인사성 밝은 아이가 아니었다. 어쩌다 누가 오면 고개를 먼저 숙...
@살구꽃
합평 :
아버지의 뒤를 따라 짬통을 운반하던 소녀는 학교에서 먼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삶에 대한 불만이 쌓이게 된다. 가난으로 인해 불행했던 학창시절은 학교를 그만두는 계기가 되었다.
과거의 한 장면을 회상하며 등장하는 김씨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일본식 땅의 주인영감, 김씨네 가족, 와세다 아저씨의 부부등.
이 글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주변인들의 이야기이다. 살아 있는듯한 인물 스케치와 눈에 잡힐듯한 풍경 묘사는, 텍스트를 마치 그림처럼 그려내는 살구꽃만의 가장 큰 강점이다. 실제 사건과 삶의 모습들을 자신만의 감각으로 풀어내는 글을 보며 한 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와세다 아주머니가 수선해 준 옷을 벗어던지고 싶었던 모습, 찐빵처럼 부풀어 오는 평소와는 달랐던 김씨아저씨의 모습,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하지만 넉넉하지 않았던 김씨 가족의 형편, 아내와 상반되는 왜소하고 볼품없는 김씨의 체구, 김씨의 헤픈 웃음과 소주병과 같은 표현들을 통해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해피엔딩이 아닌 불행한 내용의 것임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갑작스런 김씨의 죽음과 4살배기 아들 충이의 죽음, 이후 굿을 하는 장면 묘사를 통해 불행은 절정에 치닫는 느낌이다. 지아비와 핏덩이 같은 자식을 잃은 김씨 아내의 절규와 같은 흐느낌으로 마을의 불행은 사그라들 것 같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여자팔자 뒤웅박 팔자, 박식하고 유능하며 사람들을 잘 도와주던 도덕군자 와세다아저씨의 적나라한 실체, 막장드라마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인 가장 불쌍한 '와세다 아주머니'라는 묵직한 전개는 불행의 끝이 어디인지 가늠하기 힘들게 만든다.
글 말미에 등장하는 '선녀의 언니'는 김씨의 딸이 아닌 와세다아저씨의 딸로 추정된다. 끝이 없는 막장드라마의 결말은 방긋하고 웃는 선녀의 웃음으로 이어진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마을 사람들의 불행한 과거를 지나 현재를 살아가는 살구꽃의 이야기는 지금쯤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김씨의 아내와 그 자녀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 와세다 아주머니와 4자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논리 정연한 전개보다는 그림 작품을 보는듯한 묘사에 중간중간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 있기도 했다. 아마도 읽는 나의 문해력 부족인 것으로 인함인 것 같다.
한편의 그림과 소설을 보는 듯한 무척 흥미로운 글이었다.
https://alook.so/posts/E7t32z3
'상도동 사람들'이라는 소설 속 한 챕터인 '소문과 진실'을 읽은 느낌이에요. 등장인물의 특징이 분명하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힘도 놀랍고요! 저는 백수린 작가의 '친애하고 친애하는'이 떠올랐어요. 멋진 글 고맙습니다!
[합평]
에세이라기보다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어요. 자연과 사람, 시대의 풍경을 성실히 그려내시는 모습을 읽으면서,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이야기를 따라갔습니다. 등장인물이 꽤 많더라고요. 그래서 아마 7천 자에 달하는 글을 써내신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많은 등장인물이 있는데도, 그 인물들을 하나하나 정성껏 묘사하고 그려내셨더라고요. 그래서 이야기를 따라가는데 큰 무리가 없었어요. 오히려 그 등장인물들의 인생을 더 따라가고 싶을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소문과 진실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인물들 간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들여다보면서, 어떤 비밀이 숨어있을까, 진실은 무엇일까 골똘히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동시에 왜 우리는 그토록 진실을 알고 싶어할까, 소문은 진실일까, 진실에 정말로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굴까, 그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솟아나기도 했습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아무래도 이 글을 이끌어가는 화자의 이야기였어요. 글 초반에 멀리 학교를 다녀야 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왜 그랬는지 이유가 없더라고요. 그리고 학교를 가지 않고 방황하는 모습 이후에는 글쓴이의 모습이 적극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요. 물론 이야기가 아무래도 소문과 진실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필요 없다고 느낄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화자이기에 글쓴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소문과 진실에 대한 느낌이나 입장이 말미에 서술되는 게 더 완성도 있을 것 같아요.
글쓴이는 당시 겨우 중학생이었고, 이 사건들이 한 계절에 모두 일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말 영화 같았거든요. 이렇게 또렷하게 서술할 수 있으셨던 건 분명 글쓴이의 마음 속에 깊게 각인됐기 때문인 것 같아요. 처음으로 목격한 죽음이었고, 어쩌면 처음으로 목격한 어른들의 민낯일 것 같아요. 그 부분에 대한 글쓴이의 시선을 더해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살구꽃님 소설 쓰셨으면 좋겠어요. 워낙 필력도 좋으시고, 표현력도 뛰어나시고, 갖고 계신 이야기도 풍부하셔서, 살아온 삶에서 재료를 건져 이야기로 엮어내시면 정말 기쁜 마음으로, 한 사람의 팬으로 읽게 될 것 같아요.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길 간절히 바라봅니다.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연하일휘 긴 글 읽느라 애쓰셨어요. '선녀'는 정말 그 아이 본명인데 다르게 쓰려다 '선녀'여야 할 것 같아서,,, 이 글을 우연히(그럴리 없을거라고 믿고 싶~) 선녀가 본다면,
아, 쫌 괴로워지겠죠? 예쁜 조카가 생기니 일휘님 눈에 모든 것이 예뻐보이나 봅니다. ^^
꼬물꼬물 움직이는 갓난조카에게 눈을 못 뗄 것 같아요. 조카도 산모도 일휘님도 건강하시길~ :)
그냥 한 번에 읽어내려간 것 같은데....7천자라니!! 다 읽고나서 놀랐어요. 와- 역시 살구꽃님.....한 편의 예쁜 소설을 읽어내려간 느낌입니다. 선녀의 이야기........한동안 여운이 길게 남을 것만 같아요.
@박현안
오래전 위화 작가의 '허삼관 매혈기'를 읽고는 한참 잊고 있었는데, 뜻밖의 현안님의 댓글을 읽으니 '얼에모'가 제게 뭔가를 움직이게 하는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덕분에 마감전에 써서 냈는데 너무 길어져서 혹시 평해주실 분들에게 부담이지 않을까 미안해집니다.
<가랑비 속의 외침> 메모했습니다. :)
위화 작가의 ‘가랑비 속의 외침’을 읽는 것 같았어요. 시대의 풍경을 성실히 그려내는 것만으로도 빛나는 일인 것 같습니다. 7천자에 달하는 글을 한 번에 읽게 만드는 살구꽃님의 필력에 감탄하고 갑니다.
@진영
사춘기때라 열등감에 시달렸던 기억이
글로 나온 것 같아요. 후련하네요. 남은 거 다
긁어 쓰면 개운해지지 않을까요? 고맙습니다. ^^
@콩사탕나무
저도 민폐인 것 같아 줄인 건데도,,, 찔리기도 하고 눈치도 보입니다. ㅜ
합평은 애전에 기댈 말아야겠어요. 아마 열에모방장님의
넘 긴 글에 대해 한말씀 하실 듯~~@.@;;
@똑순이
얼에모 써놓고 얼룩소 돌아보는 이 시간이 잠시 넉넉하네요.
당시의 서울은 시골과 거의 비숫했어요. 지금은
그 논밭에 아파트가 들어섰겠죠?
긴글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똑순님! 평안한 주말 되시길 바라요. ^^
에세이가 아니라 소설을 쓰셨네요. 상도동과 봉천동.. 제가 오래 머물던 곳이에요..
살구꽃님과 제가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지 않을터인데 배경이 완전 시골이군요..
돼지를 키우셨다니.
마지막의 아가씨와 청년은 누가 뿌린 자식인규?
소문이 진실인지는 헷갈립니다. 찾아온 아가씨와 선녀가 나이 차이가
꽤 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뭔가 다른 반전이..
살구꽃님도 소설책 많이 읽으셨쥬?
살구꽃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시대의 소설을 읽는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재밌게 잘 읽었어요.. ^^ 소설의 내용보다 머리속으로 그려지는 단어와 문장들 때문에
다시한번 읽어봐야 겠어요..
소설 한 편을 읽었네요.
기억력이 너무 좋으십니다 ㅎㅎ
좀 후련해지셨나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긴글이지만 집중해서 잘 읽었습니다. 글 을 참 잘 쓰시는 분이시구나 느끼게 됩니다. 여기서 일회성으로 의 글로서는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들어요!!
텔레파시가 확실하구만요...오늘따라 @살구꽃 님의 얼룩소글을 모조리 다 읽고 빠져나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던지요...늦은 '좋아요'를 누르며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을 했는데...호랑쥐바뀌가 되어오시것도 감사...&
@클레이 곽 님의 말처럼 "소문과 진실"은 소설공모전 수상감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수지 님 처럼 저도 천천히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나중에 책으로 내시는 건 어떨까요? 항상 소설과 같은 글을 쓰신다 느끼지만 이번엔 정말로(그전엔 가짜였니?ㅎ) 단편 소설 한 편을 읽은 것 같습니다.
오천 자를 쓴 것에 찔리고 있었는데 살구꽃님 덕분에 안도합니다. ^^
와세다 부부와 돼지 때문인지 개인적으로 소설 <파친코>의 분위기가 살짝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글 쓰시느라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
총무님..살구꽃이란 필명의 유래를 알게되어서 기쁩니다. 감히 제가 그동안 많이 까불었던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짧은 자전적 에세이를 읽는 순간 전 박경리 작가의 토지와 신경숙 작가가 많이 생각났어요. 전 살구꽃님이 작가이신줄 몰랐습니다. "낭중지추"라는 고사성어가 떠오릅니다. 그 시대에는 모두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저보다 훨씬 어리신 분으로 착각했는데 ..저하고 비슷하거나 저보다 연배가 2~3살위인듯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저는 말씀하시는 그런동네를 초등학교때 살았었거든요..물론 중학교 다닐때까지도 적산가옥이 존재하기는 했었지만...많이 까불었던 저를 이해해주시고 항상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제 오빠가 아니고, 제가 누나라고 불러야 맞겠죠???
@콩사탕나무
저도 민폐인 것 같아 줄인 건데도,,, 찔리기도 하고 눈치도 보입니다. ㅜ
합평은 애전에 기댈 말아야겠어요. 아마 열에모방장님의
넘 긴 글에 대해 한말씀 하실 듯~~@.@;;
@똑순이
얼에모 써놓고 얼룩소 돌아보는 이 시간이 잠시 넉넉하네요.
당시의 서울은 시골과 거의 비숫했어요. 지금은
그 논밭에 아파트가 들어섰겠죠?
긴글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똑순님! 평안한 주말 되시길 바라요. ^^
옛날 내가 어릴적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동네의 풍경은 제가 더 시골 이지만 사는것은 다 거기서 거기 였으니까요.
7000자가 넘는 글을 단숨에 읽었습니다.
대단하고 존경 스럽습니다.
글 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나철여
행님, 너무 무리하시네여~ 마이 쑥스럽습니다 -.-;;
저는 단연코 곤이지지 입니다.
그리고 곤이지지가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