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만화가 사람을 죽였다"-정병섭 군 자살 사건(1972)
2022/12/16
서울 성동구 왕십리에 사는 초등학교 6학년 정병섭 군은 소위 말하는 만화광이었다. 평소 만화 보는 것을 제일 좋아하고, 만화 주인공을 흉내 내며 놀곤 했다. 만화만 있으면 다른 아무 것도 필요 없을 정도로 만화를 애정하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1970년대 초반 놀거리와 할거리가 부족했던 시절, 학생들에게 만화는 그야말로 가장 매력적인 취미 독물이었다.
1972년 1월 31일, 정병섭 군은 <철인 삼국지>라는 만화에 푹 빠져 있었다. 이 만화는 삼국지의 등장인물을 로봇으로 바꾼 일종의 과학 역사 만화였다. 몇 번을 반복해 보고 또 보았는지, 인물들의 대사까지 줄줄 욀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삼국지의 등장인물은 ‘장비’였다.
이 만화에는 마침 로봇으로 설정된 ‘장비’가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병섭 군은 자신도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을지 실험해보고 싶었다. 그는 자신의 친누나에게 내가 죽었다 다시 깨어날 수 있는지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다시 살아나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하다는 말도 덧보탰다. 그러고 나서 그는 스스로 선반 위에 줄을 엮어 목을 졸라맸다.
어린이는 특정 대상에 애착을 느낄 때, 그 대상의 말과 행동을 모방하는 경우가 잦다. 아이는 보통 어른의 행위를 모방하며 성장한다. 모방은 닮고 싶은 대상을 향한 욕망의 투사이자, 또 생의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필수적인 성장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개념이 완전하게 정립되지 않은 미성숙한 존재는 죽음을 모방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자세히 이해하지 못한다. 더구나 ‘로봇’과 ‘인간’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경우라면 서툰 흉내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의 삶과 죽음이 불가해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문화정책이 어떤 방식으로 책정되는지도 알게됩니다. 이 세상은 도대체 왜!!!
불과 50년 전에 한국판 분서갱유가 일어났었군요... 저열하고 무지한 정책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졌다니, 아직 갈 길이 한참 먼 지금보다도 비판적 사고가 안 됐구나 싶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런 사고가 일어난 더 근본적인 원인인 본질을 외면한 채 분풀이 대상, 단결을 위한 절대악을 습관적으로 찾았기 때문에 저런 사단이 난 것이겠지요. 작성자분께서는 의혹 제기에서 그치셨지만, 저는 시대상과 상황을 고려했을 때 확신이 듭니다.
하기야 저런 식의 무식하고 폭력적인 전체주의적 사고는 80년대 후반-민주화 이전까지 사실상 모든 분야에 걸쳐 만연했을 테고, 심지어는 아직까지도 일부 사안에서 한국 대중의 정서 속에 뿌리를 내린 채 있죠.
수십 년간 이어져온 압제가 남긴 상흔이라고 받아들이는 한편 참 답답해집니다...ㅠ
@nodae79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들은 대개 우리 사회가 용남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은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간편하고 속시원한 답을 찾으려고 하죠. 우리는 타인에 대한 모든 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먼 옛날의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 본문에도 나와있지만 불과 몇년전에도 게임이 청소년에게 해악을 미친다는 근거가 불명확한 주장으로 여러 정책을 시행한 적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는 이 또한 현대판 분서갱유로 여겨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글을 읽고 댓글을 달기 전 얼룩소 설문조사 문항 중 "농담의 소재는 무엇이든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이 있었는데 가볍게 답했던 제 답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desahara 님께. 교양에 어울리는 취미가 무엇이냐는 물음은 사실 취미생활의 위계를 설정하는 가장 오래된 기준이었습니다. 암암리에 고급문화와 하위문화로 구분되는 대개의 기준들을 우리는 사회적으로 학습받아 왔죠. 그래도 요즘은 서브컬쳐에 대한 매니악한 관심이 폭발적 에너지를 발휘하고 과감한 소비로까지 이어지면서 그 힘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원래 잠재된 욕망이 분출될 때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셈이죠. 저는 오타쿠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nowhere210 님께. 어른들한테 핀잔들으면서 하는 취미가 항상 더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법이죠. 만화 좋아했던 경험이 있으시다니까. 자녀분이 만화 즐기는 것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함께 즐기실 수 있겠네요. 저는 뭘 보아도 다 얻는게 있고, 도움이 되는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90년대까지도 가정의 달에는 온갖 불량 만화/서적/비디오 화형식이 벌어지던 걸 떠올려 보면 사람들이 부정한 것들의 원인을 모두 매체에 돌리고 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종종 반복되는 듯합니다. 다만 어느 매체냐가 그때마다 달라질뿐. 매체의 특성,매체가 전하는 내용을 그저 인간이 모방할 따름이라고, 그처럼 가소성만을 가진 인간 모형에 수동성만을 극대화한 상상이 여기에 끼어들어 있죠.
초등생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그리스로마신화라던가 Y책이라던가 만화라는 형식을 빌린 아이들을 위한 좋은 컨텐츠가 넘쳐나는 요즘이지만 과거 그 그림자의 짙음과 암울했던 상황은 지금과 비교해 더 답답하고 처절했겠네요.
어릴 때부터 만화를 좋아했고, 그로 인해 적지 않은 핀잔을 들었던 제 입장에서 더윽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불량만화만도 못한 언론 기사가 넘쳐나는 요즘을 본다면 그때 그 사람들은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작가님.
@박현안 님. 이 때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저 역시 오락실이나 만화방이 금지된 세대였습니다. 만화책은 어른들 몰래 보는 것이었고, 오락실은 탈선의 공간처럼 여겨졌죠. 그런 문화를 접하면 불량청소년이라도 될 것 같아서였는지, 저 역시 만화방과 오락실을 멀리하곤 했습니다. 남몰래 끈덕지게 만화와 오락을 즐기던 친구들 중에 지금은 문화 비평가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금기를 향한 몰입이 득의와 성취로 이어진 셈이지요. 알게모르게 현재 우리들의 삶과 문화에 영향을 준 과거 사건들이 참 많습니다. 차근차근 살펴보며 계속 이야기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보잘 것 없는 글 읽어주셔 고맙습니다.
앗... 저 이 사건의 피해자인 것 같아요;; 어릴 때 친구들은 만화책을 열심히 보는데 저는 늘 곁눈질만 하고 보지 못했어요. 부모님이 무슨 연유인지 만화책 보는 걸 극도로 싫어하셨거든요. 제가 무슨 나쁜 만화를 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 당시 여자 아이들이 즐겨보던 순정 만화 같은 거였는데요. ㅜㅜ 딱 한번 사촌이 놀러왔을 때 만화를 가져와서 함께 본 적이 있어요. 그게 당시 유명한 <풀하우스>라는 만화였지요. 그날만 특별히 볼 수 있었어요.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그때 경험이 남아있는지 아직도 저는 만화에 다가가기가 좀 어려워요. 요즘 아이들이 학습만화를 즐겨보기 시작해서 종종 같이 보고 있어요. 학습만화에 대해서도 말이 많더라고요. 학습만화만 많이 읽으면 문해력이 떨어진다나요;; 저는 그게 무엇이든 흥미를 느낀다면 봐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떡 먹고 죽는다 해서 이 세상 떡을 모조리 없애지는 않을 텐데... 옛날에 일어난 일들이 전개되는 방식이 흥미롭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요. 지금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도 수십 년 후의 시선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글 너무나 잘 읽었습니다. 저도 옛날 신문을 펼쳐보고 싶네요!
앗... 저 이 사건의 피해자인 것 같아요;; 어릴 때 친구들은 만화책을 열심히 보는데 저는 늘 곁눈질만 하고 보지 못했어요. 부모님이 무슨 연유인지 만화책 보는 걸 극도로 싫어하셨거든요. 제가 무슨 나쁜 만화를 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 당시 여자 아이들이 즐겨보던 순정 만화 같은 거였는데요. ㅜㅜ 딱 한번 사촌이 놀러왔을 때 만화를 가져와서 함께 본 적이 있어요. 그게 당시 유명한 <풀하우스>라는 만화였지요. 그날만 특별히 볼 수 있었어요.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그때 경험이 남아있는지 아직도 저는 만화에 다가가기가 좀 어려워요. 요즘 아이들이 학습만화를 즐겨보기 시작해서 종종 같이 보고 있어요. 학습만화에 대해서도 말이 많더라고요. 학습만화만 많이 읽으면 문해력이 떨어진다나요;; 저는 그게 무엇이든 흥미를 느낀다면 봐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떡 먹고 죽는다 해서 이 세상 떡을 모조리 없애지는 않을 텐데... 옛날에 일어난 일들이 전개되는 방식이 흥미롭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요. 지금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도 수십 년 후의 시선으로 보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글 너무나 잘 읽었습니다. 저도 옛날 신문을 펼쳐보고 싶네요!
글 잘읽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과거 독재정권 시절의 파시즘적 사고와 행동양태가 잔존하는 것 같습니다. 절차적 민주화에서 공고화된 민주화로 도약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 보고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먼 옛날의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 본문에도 나와있지만 불과 몇년전에도 게임이 청소년에게 해악을 미친다는 근거가 불명확한 주장으로 여러 정책을 시행한 적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는 이 또한 현대판 분서갱유로 여겨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글을 읽고 댓글을 달기 전 얼룩소 설문조사 문항 중 "농담의 소재는 무엇이든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이 있었는데 가볍게 답했던 제 답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초등생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그리스로마신화라던가 Y책이라던가 만화라는 형식을 빌린 아이들을 위한 좋은 컨텐츠가 넘쳐나는 요즘이지만 과거 그 그림자의 짙음과 암울했던 상황은 지금과 비교해 더 답답하고 처절했겠네요.
어릴 때부터 만화를 좋아했고, 그로 인해 적지 않은 핀잔을 들었던 제 입장에서 더윽 집중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불량만화만도 못한 언론 기사가 넘쳐나는 요즘을 본다면 그때 그 사람들은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작가님.
@박현안 님. 이 때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저 역시 오락실이나 만화방이 금지된 세대였습니다. 만화책은 어른들 몰래 보는 것이었고, 오락실은 탈선의 공간처럼 여겨졌죠. 그런 문화를 접하면 불량청소년이라도 될 것 같아서였는지, 저 역시 만화방과 오락실을 멀리하곤 했습니다. 남몰래 끈덕지게 만화와 오락을 즐기던 친구들 중에 지금은 문화 비평가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금기를 향한 몰입이 득의와 성취로 이어진 셈이지요. 알게모르게 현재 우리들의 삶과 문화에 영향을 준 과거 사건들이 참 많습니다. 차근차근 살펴보며 계속 이야기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보잘 것 없는 글 읽어주셔 고맙습니다.
어떤 유명인사가 가족을 보내고 이런 말을 했었는데... 한국은 슬픔의 유통기한을 꼭 정하려고 하고 그것을 넘어가면 이상하게 본다고....
그러나 저러나 이런 사건이 있었군요. 방송 다큐라면 원로 만화가들이 보는 저 사건의 경험담이 듣고 싶은 이야기네요. 마치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큰 영향을 주었다는 원더풀데이즈 같은 느낌이 드네요.
인간의 삶과 죽음이 불가해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문화정책이 어떤 방식으로 책정되는지도 알게됩니다. 이 세상은 도대체 왜!!!
불과 50년 전에 한국판 분서갱유가 일어났었군요... 저열하고 무지한 정책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졌다니, 아직 갈 길이 한참 먼 지금보다도 비판적 사고가 안 됐구나 싶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런 사고가 일어난 더 근본적인 원인인 본질을 외면한 채 분풀이 대상, 단결을 위한 절대악을 습관적으로 찾았기 때문에 저런 사단이 난 것이겠지요. 작성자분께서는 의혹 제기에서 그치셨지만, 저는 시대상과 상황을 고려했을 때 확신이 듭니다.
하기야 저런 식의 무식하고 폭력적인 전체주의적 사고는 80년대 후반-민주화 이전까지 사실상 모든 분야에 걸쳐 만연했을 테고, 심지어는 아직까지도 일부 사안에서 한국 대중의 정서 속에 뿌리를 내린 채 있죠.
수십 년간 이어져온 압제가 남긴 상흔이라고 받아들이는 한편 참 답답해집니다...ㅠ
90년대까지도 가정의 달에는 온갖 불량 만화/서적/비디오 화형식이 벌어지던 걸 떠올려 보면 사람들이 부정한 것들의 원인을 모두 매체에 돌리고 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종종 반복되는 듯합니다. 다만 어느 매체냐가 그때마다 달라질뿐. 매체의 특성,매체가 전하는 내용을 그저 인간이 모방할 따름이라고, 그처럼 가소성만을 가진 인간 모형에 수동성만을 극대화한 상상이 여기에 끼어들어 있죠.
좋은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부분도 있어 더더욱!
두번 꼼꼼하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