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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스와 나이키 그리고 프로스펙스



재랑님의 글들을 읽은 후 부터 며칠동안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어린 시절 기억 때문에 여기다 뱉어낸다.

나는 1979년 서울 서초동에서 태어났다.
최초의 기억이 기어다닐 때의 한 장면인데(사실이다), 아파트였다. 아마 극동아파트였을 것이다.
7살때 아버지 사업이 망해, 외할머니댁에 얹혀살기 시작했다.
외할머니 댁은 마당이 있는 큰 집이었고, 하숙집을 운영하셨다. 우리 네식구는 가장 후미진 곳에 따로 떨어져 있는 단칸방에 살았다. 네명이 다닥다닥 붙어 누우면 꽉차는 방이었다. 재래식 화장실 옆방이었고, 연탄으로 난방을 했다.
연탄으로 데운 뜨거운 물을 세수대야에 찬물과 섞어 쪼그리고 앉아 세수를 하고 발을 씻었다. 목욕탕에는 주말에 갔다.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 살았다. 그곳은 서울 XX동인데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고, 물론 부자도 있었다. 동네 이름을 삐처리 한 것은 혹시나 해서다. 나는 서울 강남의 도시들 보다 깊은 역사가 있는 그 동네를 사랑하지만, 혹시나 해서다.. 혹시나..
가난했지만 가난한 줄 몰랐다. 부모님은 언제나 나에게 좀 세련된 디자인의 옷을 입히셨다. 비싸진 않았을 거다. 그냥 부모님 센스가 남달랐다. 나는 피부도 하얗고 고와서 소위 귀티라는 게  났다. 어쩌다 외식을 해도 맛있는 것을 먹었다. 남들이 거의 먹어본 적 없는 피자도 먹고 반 아이들에게 세상에 이런 음식이 있다고 가르쳐주었다. 우뢰매 시리즈는 반드시 극장에서 보았다. 반에서는 늘 1등을 했다. 시험을 못보면 어머니한테 호되게 혼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머리가 좋았던 것 같다.

그렇게 10살까지 살다가.. 서울 서초구 방배동으로 이사를 갔다.
20평이 안되는 반지하 빌라였지만, 자가였다. 난 우리집이 재벌이 된 줄 알았다.
이사날 어머니가 내일 학교에 가면 예쁜 여자애들이 많아서 깜짝 놀랄 것이라고 했다.
다음날 학교에 가니 어린 나이라 이쁘다 이런건 잘 모르겠는데, 얼굴이 다 하얗더라.
전학 가자마자 산수경시대회가 있었다. 금,은,동상이 있는데 은상을 땄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나중에..
확실히 석차는 점점 떨어졌다. 고학년이 될수록 머리에만 의존할 수 없는 여러가지 공식들이라던가.. 시험 문제도 다니던 학교보다 더 어려웠던 것 같다. 애들도 다 열심히 공부하고.. 뭐 그런대로 상위권이었던 것 같다.
아, 이때까지도 내가 가난한 줄 몰랐다.

중학교에 갔다. 첫 시험에 중간 석차를 기록하며 드디어 평범해졌다. 한반에 대략 50명 이상이었는데, 그 후로 고교 졸업까지 언제나 나의 목표는 20등대에만 머무는 것이었다. 노린 것이 아니라 벅찬 목표였다. 공부는 진짜 못했다. 중학교 3학년때인가, 초등학교 3학년때 같은 반이었던 애와 한 반이 되었는데, 우등생이었다.
그 친구가 나에게 산수경시대회 때 동상을 받았는데, 강북에서 이사 온 애한테 졌다고 담임 선생님께 엄청 혼났었다고 했다. 그 선생.. 그렇게 안봤는데.

그리고 이 때부터 나는 슬슬 친구들이 입는 옷과 신발을 부러워한다.
게스, 리바이스, 마리떼프랑소와져버, 캘빈클라인, 나이키에어, 리복펌프
자기네들끼리 얼마주고 샀냐고 묻고 대답하는데, 굳이 알아볼 것도 없이 우리 부모님은 사줄 수 없는 가격이었다. 사달라고 할 생각조차 없었고, 갖고 싶은 마음마저 생기지 않았다. 나와 다른 세상이었다.

브랜드는 포기해도 스타일을 포기할 수는 없는 법.
나는 다른 친구와 옷을 주로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에서 샀다. 고등학교 때는 동대문이었다.
하지만 신발은.. 신발은 달랐다. 신발은.. 나이키와 리복이 아니라면 다 구리게 느껴졌다.
친구들 사이에서 내 신발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당시 내가 뭘 신고 있었는지 솔직히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지워버렸나?
그러다가 중학교 때인가 고1 때인가, 어머니가 친구 아들이 신발을 버렸다며 나에게 주었는데 리복 펌프였다.
신다가 맘에 안들어서 버린게 아니라 진짜 오래 신은 신발이었다. 너무 기뻤다. 광고처럼 펌프를 푸슉푸슉 눌러서 에어를 채워보고 뛰어보고 에어를 다시 췩~~~ 하며 빼보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였나, 아니면 역시 중학교 때였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어머니께 신발을 사달라고 졸라 함께 백화점에 갔다. 나이키와 리복 매장에 진열된 신발 가격을 보고 차마 사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프로스펙스 매장으로 갔다. 농구화를 샀다. 디자인이 너무 구렸다. 당시 그 신발을 신고 찍은 사진이 몇장 남아있는데, 내 표정도 구리다. 이 일화에서 내가 어머니께 딱히 잘못한 것은 없는데, 이상하게도 매우 미안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고등학교 때 드디어 나이키 신발을 하나 사게 된다.
진로도매센타(현 남부터미널역 근처 국제전자센터)에서 주말마다 상설할인매장이 열리는데 나이키도 판다는 전단지를 보고 친구와 함께 갔다. 유행하는 농구화도 아니고 세련된 디자인도 아니지만 살수 있는 가격이었다. 에어맥스라고도 당당하게 써있었다. 중고교시절 첫 나이키이자 마지막 나이키였다.

지금도 강남에서의 기억은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을 몰고 온다.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도 많지만, 상대적인 가난에서 느끼는 빈부격차.
서울 강남이라는 부촌이기 때문에 쌓을 수 있었던 문화적 소양.
이 두가지가 지금의 나를 만든 큰 두개의 기둥이다.

참고로 지금 나는 청바지는 리바이스, 신발은 아식스(동북아시아인 발에는 이게 진짜), 그 외 옷은 유니클로를 선호한다.
게스는 돈 벌고 사입어보니 내 체형에 잘 안맞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