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몸살을 앓게 하는 시인 - 기형도

강부원
강부원 인증된 계정 · 잡식성 인문학자
2023/04/28
시를 쓰고 있는 기형도. 출처-기형도 문학관
청춘의 몸살을 앓게 하는 시인, 기형도(奇亨度, 1960~1989)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질투는 나의 힘>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빈집>   
   
기자 시절의 기형도. 출처-기형도 문학관
   
#1.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안개는 ‘무진’만의 명산물이 아니다. 안양천 방죽의 안개도 그에 못지않다. 소하리(所下里)의 아침은 종종 안개가 자욱하였다. 기형도(奇亨度, 1960~1989)는 집에서 2km 떨어진 서울의 시흥초등학교에 다녔다. 아침 등굣길 천변을 걷다 ‘기아자동차’ 공장이 저만치 보일 때쯤이면, 어느새 안개가 그를 커튼처럼 감쌌다. 

1960년대 무진의 안개가 김승옥으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하게 바라게” 했다면, 1970년대 소하리의 안개는 기형도에게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진 아버지와 “시집도 못가고 죽은 누이”를 떠올리게 하는 “경멸할만한 추억”의 배경이었다. 
    
#2.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의 유년 시절은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며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오지 않는 어머니를 걱정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황해도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그의 아버지가 옹진군 연평도로 옮겨와 면사무소 공무원으로 일하던 때에 그를 낳았다. 3남 4녀 중 막내였다. 아버지는 영종도 간척사업에 전 재산을 투자했지만 일이 틀어져, 공무원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됐다. 

연평도를 떠나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로 이사 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이후 아버지는 늘 집안에 누워계셨다. 형과 누이 셋은 출가하고,...
강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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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신문과 오래된 잡지 읽기를 즐기며, 책과 영상을 가리지 않는 잡식성 인문학자입니다.학교와 광장을 구분하지 않고 학생들과 시민들을 만나오고 있습니다. 머리와 몸이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연구자이자 활동가로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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