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에모] 글, 글씨, 글 씨

살구꽃
살구꽃 · 장면의 말들에 귀를 모아봅니다.
2023/01/31

엄마는 오씨 성을 쓰는 아흔이 넘은 할머니다. 초저녁, 엄마가 당신 방에서 나와 주방을 서성거렸다. 나는 보리쌀에 서리태 검은 콩을 섞었다. 엄마, 보리쌀에서 서리태콩을 골라줄래요? 그래, 저녁엔 콩밥을 먹겠구나. 어제도 보리쌀에 서리태콩을 골랐던 엄마. 나머지 숙제를 하는 아이처럼 꼼꼼하게 콩을 골라 담는다. 해 떨어지는데 얘는 밥을 먹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진용이 잘 있다고 연락 왔어요. 그래? 다행이네. 그러니까 엄마 진용이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어린애도 아니고요. 알겠어, 밖이 아직 추운데 따신 밥을 제때 먹고 다니는지...
   
엄마 방에서 핸드폰이 울린다. 진용이 전화다. 응, 밥 먹었어? 어디야, 집엔 언제 와, 내일 온다구? 그래, 밥 잘 먹고 다녀. 진용이 언제 온대요? 내일! 스피커폰으로 들리는 남동생 목소리를 들었지만 다시 엄마한테 묻고 대답을 들었다. 나는 A4용지에 날짜와 요일 시간을 썼다. 그 아래 ‘엄마는 진용이 전화를 받았어요. 진용이는 내일 와요.’라는 글을 엄마한테 내밀었다. 엄마, 진용이가 내일 온다고 썼어요. 봐요, 이렇게. 읽어보세요. 진용, 이, 는,,, 내, 일,,. 와요! 글자를 똑바로 쳐다보는 엄마 눈이 반짝였다. 엄마, 다시 읽어 보시고 그 밑에 싸인 해요. 싸인? 무슨 싸인까지 한다구. 그거 안해두 알아. 나 아직 멀쩡해. 멀쩡하다고 말하는 엄마는 멀쩡하지 않다. 엄마가 희미하게 웃었다. 연필을 잡은 엄마의 손동작이 아주 진지하게 움직인다.자, 싸인 다 했어. ‘오’라는 글자를 에워싸고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동그라미에 엄마의 기억이 갇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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