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도'가 아니라 여성'이' 군대를 가야 하는 하나의 이유

오찬호
2023/01/31
"여성도 민방위 훈련을 받아야 한다."

이 표현의 핵심은 민방위가 아니다. 민방위 훈련이 (그 현장이 얼마나 처참한지는 차치하고) 전투 대비가 아닌 재난 재해시 생존 매뉴얼 습득을 주로 하는 것이기에 병역의무 논란으로 이어질 필요가 없다고 변명을 한들, 언어는 발화되는 사회 안에서 읽힌다. 어휘 하나에 묻은 편견을 예측하지 않는 건, 그 자체가 이미 충분한 의도다.

여성‘도’라고 하는 순간, 그건 무조건 남자‘만’이라는 추임새로 이어지고 자연스레 ‘왜 여자만’이라는 해묵은 구도와 연결된다. 그리고 배려, 특혜 등의 단어가 덕지덕지 부정적 의미로 붙는다. 그 끝에, ‘권리만 주장하고 의무는 하지 않는 어떤 성별의 이기적인 익숙한 모습’이 둥실둥실 사회에 부유한다.

여성도 민방위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김기현 의원은 이대남 표를 노리는 포퓰리즘, 젠더 갈라치기 등의 비판이 있은 후 진행한 방송 인터뷰에서 “왜 여성만 훈련 안 받아도 된다는 그런 논리를 펼치는지 저는 도저히 수긍할 수가 없다”라고 했다.

이 여성‘만’은, 필시 진흙탕과 연결되는 밑밥이다. 남성만 훈련받는 건 차별이다, 진정한 성평등은 여성도 군대 가는 것 아니냐는 식의 이야기와 겹쳐지지 않는 게 불가능하다. 게다가 몇 개월 전에 “여성도 군사 기본 교육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된다”라고 말한 당사자 아니었던가. 그러니 여성'도'는 불쏘시개다. 민방위는 핑계다.
무수한 논쟁에서 ‘여성은 훈련 안 받을 권리가 있다’, ‘훈련은 남자만 받는 거다’라는 식의 주장은 있지도 않았다. 군복무와 그 연장선(예비군과 민방위)에 남성‘만’이 의무를 지니게 된 것에 여성의 힘은 단 1g도 개입된 적 없다. 처음부터 여성은 ‘여자라서’ 배제되었고, 남성은 ‘남자라서’ 배제되지 않았다. 태초에 남녀 누구나 군대 가는 정책이 있었는데 이를 이기적인 여성들이 항의해서 남자만 고생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그러니, 여성은 혜택‘만’ 누린다는 접근은 몰역사적 이해인 거고 여기에서 분출되는 여성‘도’ 의무를 다하라는 식의 이야기는 성차별적 편견을 활용해 사회에 전혀 도움 되지 않은 해법을 근시안적으로 만들 뿐이다. 악순환의 선순환은 이렇다.

"여성이 군대를 간들 ‘진정한 성평등’이 실현될 리도 없다. 오히려 여성을 분리하고 배제시킬 명분만 강화된다. ‘이제는 여성도 군 복무가 가능하다’는 토대의 긍정적인 변화가 아닌, ‘앞으로 여자도 당해봐라!’라는 푸념으로 만들어진 어설픈 조치들은 낯선 공간에 유입된 새로운 이들을 기존의 고정관념을 총동원해서 난도질해도 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지금껏 군대는 ‘너희들은 앉아서 오줌 싸는 여자들하고는 달라야 한다’는 망언을 동기부여랍시고 떠들었고 심지어 여군들에게는 ‘너희들은 군인이지, 여자가 아니다’라면서 존재를 부정하라고 강요했다. 이런 곳에서 여성이 어떻게 해석되겠는가. ‘군대에서도 징징거리는 여자’ ‘군대에서도 오또케 오또케 하는 여자들’이라는 빈정거림이 창궐하지 않겠는가."
오찬호. "고통의 평준화에 반대한다"(경향신문. 2021년 5월 3일)

이 정도로 논의가 흘러가면, 평등을 중요시 여기는 북유럽 여러 나라가 여성 군 복무를 강제로 하고 있음이 꼭 언급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짚어야 할 것은, 여성‘도’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 여성‘이’ 복무하면 군에 도움이 된다는 전제가 선명하다. 최근 덴마크의 국방부장관은 여성 징병제 논의에 “더 많은 여군이 복무하게 됨으로써 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남성‘만’의 조직으로는, 그게 군대라 할지라도 한계가 있음을 뜻한다. 특히 엄청난 정보 사이에서 첨단장비를 활용해 집단지성을 모아야 하는 현대의 안보상황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이 전제가 합의되면, 남자가 억울하니 여자도 복무하라는 게 아닌 여자가 복무하면 공동체가 더 안전해진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이 흐름이 가능할 때, 여성‘도’가 나올 수 있다.

군대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왕따, 비리 등의 문제를 보면서 느끼는 생각은 비슷할 거다. 피해자가 목숨으로 세상에 진실을 알리는데도, 어찌 저 조직은 감추는 데 급급할까, 끼리끼리 쉬쉬 할까. 군대 아니었으면 진작에 난리 났을 것이다, 아직도 군대는 멀었다 등등.

이런 문제가 반복되는 큰 원인이 남성‘만’이 조직을 대변하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때, 여성‘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남자만 죽도록 고생하니, 여자도 고생하라는 건 정책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여성‘이’ 개입해서 남자든 여자든 어처구니없는 폭력에 노출될 확률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이야기는 얼마든지 생산적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

지금의 한국에서 여성 징병제를 논하려면 이유는 단 하나여야 한다. 군대는 남성적이라는 기본값의 반성과 변형을 통해, 정말로 강한 군대를 원할 때 이 논의는 의미를 지닌다. 남성들의 시야에 여성들이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시야로 기존의 판이 비판받고 변화가 가능해질 때, 그런 참여를 보장받을 때 여성‘도’ 당연히 군대를 가야 한다.

남자만 고생하기에 여자도 고생하면 국가 전투력은 강화될까? - 사진 픽사베이
오찬호
오찬호 인증된 계정
작가
여러 대학에서 오랫동안 사회학을 강의했고, 사회가 개인을 어떻게 괴롭히는지를 추적하는 글을 씁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를 시작으로 최근작 <민낯들>(2022)까지 열세 권의 단독 저서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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