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에모]설렘 발견, 종이와 연필은 내 운명

살구꽃
살구꽃 · 장면의 말들에 귀를 모아봅니다.
2023/02/15
-동상이몽(同床異夢)
한겨울이었다. 골방에서 20대 두 여자가 만났다. 한 여자는 이미 와서 두꺼운 이불을 덮고 누웠다. 또 한 여자가 바람을 피해 헐레벌떡 들어왔다. ‘왔니, 춥지.’ ‘바람 많이 불어. 근데 여긴 밖에서 보면 그럴싸한데 외풍이 정말 세구나.’ 나는 책상 옆에 딸린 의자에 앉아 곱은 손을 비볐다. 

페인트가 벗겨진 책상은 노인 얼굴에 핀 검버섯처럼 군데군데 녹이 슬었다. 나는 가방 속에서 4절 크기 도화지와 잉크, 펜, 지우개 따위를 꺼냈다. 

커피포트에 물이 끓자 맥심일회용커피가 들어있는 정사각형 봉지 두 개를 꺼냈다. 아까부터 계속 누워있는 윤희(가명)가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너 어디 아퍼?.’ 그냥 졸음이 온단다. 커피가 따끈하다고 했다. 

“난 안 먹을게, 임신했거든. 미안한테 나 좀 더 잘게.”

바람이 지나간 것인가. 아니면 폭풍으로 휘몰아치기 직전의 고요함일까. 윤희는 말없이 그대로 누워 있었다. 담담히 임신소식을 알리는 윤희 목소리가 한차례 이명으로 머물다 사라졌다.

윤희의 임신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과외선생으로 만나 지금껏 이어지는 남친 얘기를 종종 듣긴 했다. 내가 윤희를 만난 건 2년 전이다. 둘 다 20대 중반을 넘기고 애니메이션 학원에서 만났다.

윤희는 대학을 졸업하고 부모님 사업을 돕는 중에 애니메이션에 뜻을 두고 있던 터였다. 나는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 다음 학기 등록금 때문에 만화 펜 터치 등 관련된 알바 일을 하고 있었다. 이 일은 안면이 있던 학원장 소개로 하게 되었고 또래인 윤희와 쿵짝이 맞아 합류하게 되었다.

당시 윤희의 고모는 신라호텔에 딸린 장충동의 다른 건물을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 건물 끝 모서리에 붙은 골방 하나를 쓸 수 있다고 했다. 마침 ‘작업실’공간이 필요했던 터라 그곳은 우리 아지트가 되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결혼 전 임신한 윤희에겐 그 골방이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을 차단하고 몸과 마음을 누이기에 안성맞춤이 되었다.

윤희와 나는 같은 자리에서 각기 다른 생각에 골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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