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에모] 글이 내 삶에 스며들다

콩사탕나무
콩사탕나무 · 나답게 살고 싶은 사람
2023/01/30

겨울방학 숙제로 매일 일기를 써야 하는 아이가 누구 들으라는 듯 볼멘소리를 한다.

“지민이는 베트남 여행 다녀왔다는데 난 특별한 것도 없고, 매일 똑같은데 일기를 뭘 써?”

“겪었던 것 뭐든 쓰면 되지”

“그럼 밥 먹고, 만화책 보고, 줄넘기하고, 씻고, 잤다고 쓸까?”

“응, 그렇게 써도 돼! 꼭 특별한 것만 쓰지 않아도 돼.”

“그럼 선생님한테 혼날 텐데”

“저녁에 잡채를 먹었지. 네가 먹고 싶다고 해서 엄마가 해줬잖아. 잡채에 뭐 뭐 넣었지? 맛이 어땠어?” 

아이의 눈이 반짝이더니 하얀 일기장에 연필로 또박또박 글자를 채워나간다. 제법 길게 쓴 내용은 이러했다. 며칠 전부터 보던 만화책에 잡채를 먹는 장면이 있었다. 그것을 보니 너무 먹고 싶어 엄마에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빨간색, 노란색 파프리카, 주황색 당근, 내가 싫어하는 시금치, 어묵, 양파를 넣은 잡채는 여러 가지 음식을 골라 먹는 쿠우 쿠우 같았다. 

여러 가지 재료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한 접시의 잡채를 뷔페에 비유를 한 것이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아이는 만족스럽게 일기를 썼고 며칠간은 무엇을 쓸지 별 고민이 없는 듯했다. 부작용이라면 일기의 주제가 매번 먹을 것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아이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내뱉었지만 정작 나는 요즘 무엇을 쓸 것인가를 항상 고민한다. 딱 초등학교 2학년 수준이다.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는 초심자의 행운처럼 겁 없이 써 내려갔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솟아나던 글감들은 어느새 말라버렸다. 도무지 쉽게 쓰이지 않는다. 

여행을 다녀오거나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던 날은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과 감정들을 놓치지 않으려 재빨리 글을 쓴다. 귀찮아서 미루다 보면 며칠만 지나도 그때의 감정들이 기억나지 않고 퇴색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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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지만 천천히 정성을 다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schizo12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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