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벌은 나를 잘하게도 자라게도 하지 못했다.

천세곡
천세곡 · 남들과는 다르게 누구보다 느리게
2023/04/14
Photo by Artyom Kabajev on Unsplash



공부라면 담을 쌓고 사는 편이다. 당연히 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주 일관되게 열심히 공부를 안 했다. 열 번 혼나면 아마 아홉 번은 공부 때문에 혼이 났던 것 같다. 
 
  내가 어릴 때는 채점한 시험지를 집으로 가져가서 결재서류 마냥 부모님 싸인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선생님께 다시 제출하는 것이 일종의 룰이었다. 당연히 공부를 못했던 나에게 성적이 나오는 날은 항상 매를 맞는 날이었다. 집에 가기가 무척 싫었다.     
 
  초등학교 2학년 교실, 선생님께서 채점된 시험지를 나눠주시던 날. 내 이름이 불렸고 앞으로 나가 시험지를 받았다. 주룩주룩 빨간 비가 내리고 있다. 자리로 돌아와 틀린 개수를 세어봤다. 정확히 스물아홉 개였다.   
   
  총 몇 과목에 몇 문제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어마무시하게 못 본 것은 확실하다. 어린 마음에 내가 생각해도 참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이걸 어떻게 보여드려야 하지 걱정이 되었다. 혼날 생각에 눈앞이 벌써 캄캄하다.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몰래 넘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놈의 싸인 때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야속하게도 이런 날은 수업이 빨리 끝나 벌써 종례시간이다. 알림장을 적고 받은 시험지도 함께 접어 가방 속에 집어넣는다.    

  아버지께서 늦게 오시기라도 한다면 좋으련만. 이런 날은 희한하게 일찍 집에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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